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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5

김갑수의 박진영 비평글이 불편한 이유.



김갑수의 박진영 비평글이 불편한 이유.

김성은 / 무직(젠장..)


얼마 전 지인이 페이스북을 통하여 2014년 11월 18일 뉴욕중앙일보에 실린 김갑수의 글을 접했다. 물론 글의 제목, 부제목, 마지막 문단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박진영 비평글이 아니예요'라며 입꼬리를 올리지만, "나는 한국 가요계에 정말로 심각한 암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가수 박진영이다."라고 시작하는 그의 글은,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의 절정에 서 있는 <K팝스타>의 심사위원인 박진영에 대한 비평글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박진영으로 인해서 가수의 꿈을 가진 청소년들의 개성은 말살되고 그들의 노래와 태도는 획일화되어갈 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다. 소위 '공기 반 소리 반'의 스타일로 말이다.

그의 비판은 한편으로 가려웠던 부위를 시원하게 긁어준다. 전반적으로 옳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박진영은 자기의 취향을 일종의 '왕도' 혹은 '유일한 길' 마냥 강조한다. 때로는 방금 노래를 끝마친 참가자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어 놓을 정도로 혹평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의 기반이 '오디션 형식'인 까닭에, 참가자들은 그의 취향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 시즌이 마무리될 때면, 참가자들의 음악적 색깔은 대부분 '비슷'해진다. 다음 시즌에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자 하는 희망자가 있다면, 지금까지 노출된 그의 '취향'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질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김갑수의 비평의 대상이 과연 정확하게 설정된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나서다 보면, 비평자가 박진영을 '암적인 존재'로 보려는 그의 판단 근거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바로 '꼰대질'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소 과격한 표현을 구사해도 용서하시라.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중략) 정말로 그렇다고 확신하니까." 중간에 한 문장("명예훼손 소송을 걸어와도 할 수 없다")을 생략한 것은, 그렇다고 명예훼손 소송을 걸지는 말아달라는 필자의 비굴한 통장잔금 사정 때문이다.

필자가 김갑수의 비평을 비평하는 지점은 그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자리한다. 바로 <K팝스타>는 이미 그 포맷부터가 'K팝'이라는 용어가 의미를 가지는 시장 안에서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을 찾기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슈퍼스타K>나 <위대한 탄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데, <슈퍼스타K>나 <위대한 탄생>이 설령 숨겨진 옥석을 가려서 그 중에 '누가 제일 노래를 잘 부르는가'를 평가하는 명예로운 '실력 가리기' 대회라는 외양을 취했다 할지라도, 이미 해당 프로그램 및 그 (우승자를 포함한)참가자들이 소비되는 양태는 그리 순진할 수 없다. 하물며 한국 가요계의 대표적인 연예기획사 대표들을 심사위원으로 삼아, 이미 자기 기획사로의 스카웃까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포함해놓은 <K팝스타>랴.

<K팝스타>는 이미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언뜻 보기에는 참가자들이 <K팝스타>의 주인공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K팝스타>의 진정한 주인공은 기실 박진영을 포함한 심사위원 3인이다. 이것이 바로 참가자의 노래 중간중간에 심사위원들의 다양한 표정을 비춰주는 이유이며,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 널리 회자되는 이유이다. <K팝스타>가 재미있는 이유는 단순히 참가자 편에서 소망하는 소위 '합격' 혹은 '성공'이 현실화될 때의 쾌감 때문이 아니라, 시청자가 국내 굴지의 기획사 사장의 입장, 즉 상품(참가자)을 구매(합격)하는 권력의 쾌감을 대리적으로 누리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참가자)이 각자의 상품의 상품성 및 장점을 소개(노래)하는 동안 느꼈던 자신의 느낌이, 전문가의 후기(심사위원들의 심사평)와 얼만큼 일치하는지 살피면서, 자신의 느낌이 전문가의 후기와 같았다면 '전문가 못지 않은' 자신의 상상적 지위를 즐기는 것이고, 자신의 느낌이 전문가의 후기와 달랐다면 전문가의 의견을 통해 자신의 '음악 듣는 수준'이 높아지는 듯한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사실상 참가자가 아닌 심사위원에 자신을 이입할 때에 <K팝스타>가 더욱 재미있어진다. 참가자의 실력, 준비 과정, 떨리는 마음 등은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K팝스타>에서는 심사위원이자 기획사 대표의 권력에 올라타 상품을 고르는 계급적 쾌락이 더해진다. 당연히, 다음 라운드로 올라가는 '합격자'들과 '우승자'들은,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사실상 '누가누가 더 잘하나'가 아닌 '누가 더 잘 팔리나'로 판단된다. 정점인 '우승자'들은 '기획사 입사' 혹은 '데뷔'의 영예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들은 우승의 그 순간에서부터 '상품화'된다.

박진영은 기실 '상품 구매자'이다. 손님은 왕이 아니던가. 와이파이 잘 되는 스마트폰을 사고 싶은 소비자가 판매자에게 와이파이 잘 터지냐고 묻는 것이, 와이파이가 잘 안 터지는 스마트폰에게 와이파이가 잘 안 터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박진영은 그 속에 속한 상품 구매자로서,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찾고 있을 뿐이다. 양현석과 유희열 역시 동일한 자격으로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것이다. '어떤 상품이 가장 좋은 상품이다'라는 기준이 각 구매자에게 있기 마련이다. 박진영이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상품의 특성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유려한 작곡가인 유희열이 이진아의 더 유려한 코드진행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대중적인 결과물을 내려는 기획자 양현석이 뛰어난 음악가 이진아에게 대중성 운운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각자 자기가 구입할 상품에서 원하는 특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상품이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욱이 그 상품이 '멋지고 예쁜' 외양을 가지고 있다면, 상품의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그렇다면 문화평론가로서의 김갑수가 정작 냉소적으로 폭로해야 할 것은 '무명인의 깜짝 성공기'의 탈을 쓴 채 기실 상품과 구매자를 연결하는 '매대' 역할을 하는 <K팝스타>의 정체이며 또한 이를 지속시키는 제작 수뇌부여야 한다. 김갑수가 느끼는 '획일화'는 단순히 박진영이 자신의 좁은 취향을 보편화시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아니, 보다 엄밀히는 박진영이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의 취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제작진은 보다 개성있는 음악이 <K팝스타> 안에서 소화될 수 있도록, 박진영의 음악적 스타일만 고집되지 않도록, 박진영의 심사평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심사위원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시청률을 위한 꽤 괜찮은 지금의 심사위원 조합을 깨면서까지 공익을 위해 새로운 심사위원을 등장시킬지는 모르겠다.

김갑수가 정말로, '스티비 원더'나 '조니 캐시', '글렌 굴드'가 나올 수 없는 <K팝스타>의 현실에 대해 한탄하고자 한다면, '상품'이 되지 않은 채로는 음악을 할 수 없는 우리나라 음악계의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편이 더욱 옳고 또 더욱 필요하다. 굳이 여러 장르 다 잘 할 필요 없이 하나의 음악적 스타일을 깊이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비로소 <K팝스타>의 실체를 까발리고 코웃음쳐줄 수 있을텐데 말이다. 필자는 음악인이 아니라는 핑계로, 굳이 음악계의 구조를 바꿔야 할 거룩한 부담이 없는 탓에, 그저 그들이 찾는 상품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노래하고 자신을 보여줄 자리를 제공해주는 것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 싶다. 또한 참가자들의 놀랄 만한 실력으로 인해, 그저 아무런 노력과 실력 없이 '나 아이돌 될래' 하는 아이들이 "나보다 노래 잘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쌓이고 쌓였다"라는 절대명제를 빨리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김갑수가 여전히 박진영'만'을 비판의 대상을 삼으려는 것은, 그가 언급한 바, 그의 예의 없는 심사평 때문이다. 박진영의 "언제나 가르치려 드는" 태도는, 영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라며 비판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자신이 구매하게 될 수도 있는 상품에게서 '잠재적 상품성'을 바라는 것을 무어라 비판할 것인가. 만들어진 구조 안에 그저 기능하고 있는 개인에 대해 무어라 비판할 것인가. 오히려 참가자들이 '고맙게' 여기는 부분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한국 사람 특유의 오지랖일지도 모르는 그의 '가르치려드는' 성격은, 정작 '상품'이 되려는 그들에겐 '자기성찰'의 긍정적 기회일 수 있다. 탈락하는 참가자들의 대부분의 증언대로 박진영(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에게 혹평을 받는 것은 때로는 매우 특별한 기회로 여겨질 수 있는데, 이는 박진영이 그들을 진지한 '평가대상'으로 대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냥, '잘하네요' 하고 말지 않아서 고맙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필자는 그 안에 담긴 권력 관계가 못내 불편하며, 또한 '상품-구매자' 관계 안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좌절감을 안겨주게 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으며, 그러한 점에서 앞에서 밝힌 대로, 박진영의 언설과 태도에는 분명히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

"박진영은 말을 너무 막 하더라? 아는 것도 없으면서? 글렌 굴드나 들어보지?"라는 말을 '고급'스럽게 포장한 그의 글에서는 꼰대 냄새가 난다. 그냥, 자꾸 오지랖 부려서 사람 짜증나게 하는 박진영이 꼴보기 싫다고 해라. '나대는' 박진영이 그리 젠틀하지 않아서 싫다고 해라. 차라리 싸가지 없다고 얘기하지. 그랬다면 필자는 좀 더 김갑수의 비평에 심정적으로나마 동의할 수 있겠다. 아. 그렇게 노골적으로 썼다가는, 박진영을 '암적인 존재'로 규정한 자신도 박진영과 같이 진흙탕에 들어가게 되는 꼴을 겪게 될거란 계산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점잖게 '개성' 운운하면서도 정작 참가자들을 '상품화'시켜버리는 구조는 보지 못하는 그의 비평이 필자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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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의 박진영 비평글)
(출처: http://m.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977727)


[시인의 음악 읽기]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모든 정석 타파 … 제멋대로 연주해 더 매력

김 갑 수 / 시인.문화평론가
[뉴욕 중앙일보] 11.18.14 11:55

다소 과격한 표현을 구사해도 용서하시라.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와도 할 수 없다. 정말로 그렇다고 확신하니까.

나는 한국 가요계에 정말로 심각한 암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가수 박진영(사진)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의 지대한 영향력 탓에 가수를 지망하는 이 땅의 숱한 청소년이 붕어빵 틀 속에 갇히고 있다. 다들 똑같은 발성을 연습하고 이른바 겸손함이라는 똑같은 '애티튜드'를 강요받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온당한 일인가.

언제부터인가 주말에 아내와 함께하는 즐거운 일과가 생겨났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시청하는 것이다. 엠넷의 '슈퍼스타K'를 필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성행하는 각종 오디션 프로를 참 즐겁게 시청해 왔다. 그중 SBS의 'K팝스타'는 음악 외적 설정을 최소화하고 오직 노래 실력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꽤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다. 오디션의 특징은 출연자 못지않게 심사위원의 언행이 화제를 불러 모은다.

미국 팝의 흐름을 멜로디 라인에서 비트로 전환시킨 것이 마이클 잭슨인데 박진영은 그 대세를 훌륭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한 실력 있는 뮤지션이었다. 음반 제작자로서도 기획사 대표로서도 그는 꽤 유능한 인물인 것 같다. 그런데 'K팝스타'의 심사위원으로 그가 행하는 발언들을 접하며 경악을 금치 못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가르치려 든다. 가령 노래할 때 숨소리는 '공기 반 소리 반'이어야 한다는 명언을 했다.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고 윽박지르는 광경도 여러 번 봤다. 그런 발성에 적합한 성대를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다른 호흡으로 노래하는 가수의 매력은 뭐란 말인가. 공기 소리는커녕 꼭 막힌 비음과 바이브레이션만으로 청중을 쥐고 흔드는 스티비 원더는 못 부르는 가수인가. 고함치듯 빽빽 내지르는 밴 모리슨이나 신경질적으로 울부짖는 로버트 플랜트에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호흡법 때문이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 내지르는 자유로움 탓이다. 이른바 영혼의 울림을 전달받는 것이다.

음정이나 리듬감에 대한 지나친 강조도 마찬가지다. 죄수들의 영웅이었던 컨트리계의 대가수 조니 캐시는 평생토록 음정이 불안했다.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나 지미 헨드릭스도 딱딱 떨어지게 음정을 맞출 줄 몰랐고 밥 딜런의 노래 리듬은 아예 포기한 듯이 왔다 갔다 한다. 그들은 모두 한 시대의 기린아다. 제멋대로 하는 개성 속에서 매력을 발견하는 것이 대중음악의 속성 아닌가.

언젠가 혼혈 소녀가 나와 솔(soul)풍의 노래를 무반주로 멋들어지게 소화했다. 박진영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나 노래 잘해라고 과시하는 것 보기 싫다"고. 그때 그의 절망한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오디션이란 노래 솜씨를 뽐내고 과시하는 자리인데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이른바 '겸손함'의 강요는 어린 참가자들을 위선적으로 만들어 놓기 십상이다.

심사 태도로서 가장 큰 문제라고 느끼는 것은 회차가 올라갈수록 매번 다른 것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온갖 장르를 다 잘하라는 것은 자기 스타일을 가진 뮤지션이 아니라 장기자랑의 재주꾼을 주문하는 꼴이다. 가수 지망생들에게 음악정신에 심히 위배되는 요청을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하고 있다.

갈수록 오디션 참가자들 노래가 비슷비슷해지고 있다. 오디션 전문학원이 성행하는 탓이란다. 학원에서는 심사위원 구미에 맞춰 반복학습을 시킨다. 이건 음악도 뭣도 아니다.

한국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브리튼즈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를 빼놓지 않고 본다. 스타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이 '이렇게 노래 부르라'고 가르치고 강요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다만 각각의 개성에 대해 호불호의 반응을 보일 뿐이다.

개인을 콕 집어 비판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음악이론에 정통해 보이니 모를 리가 없겠지만 나는 박진영에게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를 진지하게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굴드는 피아노 터치의 모든 정석을 다 깨 버리고 그야말로 제멋대로 연주한 인물이다. 굴드와 다른 피아니스트의 바흐 연주를 비교해 들으면 완전히 다른 곡처럼 들린다. 클래식음악에서 대중음악까지 모든 뛰어난 연주와 노래는 '이렇게 하라'는 정석과 통념을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박진영에서 글렌 굴드를 오가는 동안 가을이 깊어간다. 이번 일주일 내내 날마다 굴드 연주를 듣고 있다. 혹시 클래식음악에 처음 관심 갖기 시작한 분이 있다면 굴드의 바흐 연주 가령 영국조곡이나 평균율에 집중해 보라고 권한다. 클래식의 짜릿함이 뭔지를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