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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숨겨진 말씀의 형태로 인간에게 주어진다. 성서 안에 현존하는 계시는 숨겨진 계시이다. 성서의 말은 하나님에 '관한(about)' 말이며 동시에 인간에 '관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에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나와 나 사이에 직접적인 만남은 없으며 오직 말 안에 감추어진 만남만이 있는 것처럼, 직접적인 계시란 없고 오직 인간의 말 안에 감추어진 계시만 존재한다. 텍스트의 인간의 진술은 그리스도의 영의 직접적인 진술로 간주될 수 없으며, 따라서 주석가는 '어떤 특수한 장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표현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 Rudolf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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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하여,


1.
"성서의 말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라는 것을 주의깊게 독해해야 한다.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1)그것이 신성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만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아니면 2)신성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면서 동시에 그 손가락도 신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3)가리키는 것 없이 그 자체로 그냥 신성인지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많은 논의와 역사와 공간이 나뉘어져 있다.



2.
3)의 입장을 취하는 순간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성서우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것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기 어렵다면, 최근 유행하는 이단인 신천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되겠다.


그들도 분명히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는데, 그 결과는 '이만희재림예수설'로 도출된다. 이에 대해 그저 '결론'이 잘못된 결론이므로 이단이라고 판단하게 된다면, 엄밀하게 말해서, 신천지를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것이며, 신천지는 기성교회와 교리를, 나사렛 예수를 보았으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어리석은 유대 바리새인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면서, 나름의 내부적 정당성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초대그리스도인들도 소위 정통 유대교인들의 구약신앙에서 벗어나 매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약신앙으로 들어간 것처럼, 신천지도 자신들을 새로운 차원의 계시의 역사로 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인류'로 투영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경관과 성경해석방법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결론 역시 정당하지 않다고 반박해야 한다. '문맥'은 온데간데없이, 문자 그대로 짜맞추어서 알수있는 또다른 직접적인 계시가 존재하며, 그것의 '비약'을 부던한 '합리화'를 통해 성경을 읽어내려는 그들의 시도는, 아마 그들이 읽어내려는 것이 '국사교과서'나 '신문기사'였다면 피식하고 웃어버릴, 유치한 수준의 해석학적 방법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해석의 대상이 '신비'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아이러니하게 용인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건 샤머니즘신앙이지, 그리스도교신앙은 아니다. 복음주의권에서도 널리 용인되는 '유기적 영감설'이 말하는 바는 이러한 신비적인 해석의 '절대성'과는 '절대적'인 거리가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수면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하기를 어려워한다. 나 또한 그러한데, 이유는, 우리네 소위 '정통' 안에 있다 하는 교회와 목사님들도 이러한 문자주의적 해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어쩌면 우리네는 신천지와 별다를바 없는 해석학적 방법론으로 성경을 읽어내고 있기도 하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결과물이 큰 틀의 정통교리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어서 드러나지 않을 뿐, 건강한 출발점으로서의 성경관과 성경해석방법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엄밀하게 그 결과물이 과연 기독교적인가를 말해본다면 그건 또다른, 울분에 찬 '긴 글'이 되어야 하겠기에, 여기에서 멈추어야 하겠다.)



3.
성서는 '인간의 글'로 쓰여져있다는 점에서, '손가락'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한정되어 존재하지 않으시고 동쪽의 이름모를 나라의 무수한 '예배당'에도 존재하시며, 또한 예배당 바깥의 인간의 모든 역사와 삶의 자리에까지 계신 것과 같이, 성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제약적 장소'가 아니다. 성서는 그 방대한 페이지수보다 훨씬 더 방대하신 하나님 그분 자체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 존재한다. 다시말해 성서는 God himself/herself/themselves가 아니다. 이것은 성서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 아닌, 무한하신 God himself/herself/themselves의 권위를 훼손시키지 않고자 함이다. 그러한 점에서 성서는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 읽혀야 한다.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성서'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4.
그러나 여전히 1)과 2)사이의 차이점이 남아있다. 이 사이는 어쩌면 종잇장 한장 차이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1)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이신론 혹은 오늘날 불트만 신학에 대한 정당하고 신랄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신성'에 참여하지는 않는, 그냥 '손가락'이기만 한 '손가락'이라 함은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 텍스트에서 역사적 사실성을 제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물론 이 문장 안에는 정말 여러가지 신학적 이슈와 논의가 함축되어있는데, 그걸 다 이야기하기에는 이 글이 이미 너무 길어졌다.ㅠ) 물론 하나님은 물론 손가락이기만 한 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실 수도 있겠지만, 역사성에 정초되지 않은 신앙이 과연 역으로 인간의 실존적 역사 안에서 실존을 이끌고 갈 힘으로 작용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5.
이러한 여러가지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의 성서해석에 대한 글은 우리로 하여금 적어도 성경이 그 자체로 '하나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손가락'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성서우상주의에 빠지거나 혹은 이신론에 빠진다면, 오히려 성경을 보는 눈은 단순화되어 '쉬운 답'을 제공해줄 것이다. 마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을 경험하는 듯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통해 결과적으로 양산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부분적'인가를 생각해보라. 어쩌면 우리는 본래적 하나님과는 너무나도 다른 하나님을 우리의 인식 가운데 '하나님'으로 상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6.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렵다. 왜그렇게 일을 어렵게 만드느냐고 묻지 마시길. 원래 유한자는 '무한'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자'는 '유한자'의 이해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쉬운 답'은 '무한자'를 '유한' 안에 가두려는 우리네의 그릇된 욕망일 뿐이다. 목마른 사슴의 '갈망'이 아니라, 욕구충족을 갈구하는 인간의 소유욕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즉 '유한자'가 '무한'을 힐끗이나마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객관적 달성에 있지 않고 오직 '주관적 지향'에 달려 있다. 타율적 동기에 의해 무언가를 해놓았다고 해서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되기를 자처하는 그 주체적 지향의 과정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다고 하여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성경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자 하는, 소위 '믿음 좋은' 이들이 있다. 논리적으로 매우 만족스럽고, 경험적으로 친구들과의 관계나 연인관계 안에서 확증된바, 다른 시간을 최소화하고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과 경험을 늘리면 늘릴수록 '친밀함'이 깊어지는 바를 체험해왔던 터. 그러나 중심의 타는 듯한 마음을 매우 이해하지만, 어불성설이다. '무한자'를 '유한자'로 오해했다. 그것은 절대로 '지향'이 될 수 없고 '달성'으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이 '바깥'을 향하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향'은 궁극적 도달점으로서 '하나님'을 상정하지만, 그 도달점은 도대체가 '신비'에 쌓여계신 분이시기에, 그 궁극적 도달점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목적이 필요로 하며, 구체적 목적은 실존적 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지배되어 시시각각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달성'은 그 목표가 하나님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한번 목표를 세웠으면, 그것을 달성하면 그만이다. 달성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지향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해가면서 구체적 목표를 수정해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는 전혀 다른 양태로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오해하고 있는 '내 생각'을 따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타인의 이웃됨을 지향할 때, 그 과정 속에서의 하나님을 사랑함의 과정으로서의 묵상과 기도의 과정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연결하면서 '그와 같다'고 표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향성이라 믿는다.




8.
아이폰으로 게시판에 글을 쓰는건 너무 어렵다. 전체가 한 눈에 보이지 않으니, 글의 구성이 한켠으로 빠지기 쉽다. 퇴고에 퇴고를 거쳐야 마땅하겠지만, 그래봐야 얼마나 온전한 글이 될까 싶어, 염치를 무릅쓰고 아이폰 싸이월드 어플의 불편함을 핑계로 그만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해야 할 과제에 대한 두려움이 급작스럽게 엄습한 탓이기도 하다. 트위터 계정을 지워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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