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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이런 교회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교회 공동체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유학을 앞두고 있으니. 10년 잡고 있는 신학함의 유학이 끝난 이후에, 이런 교회 공동체를 만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우리 가족과 너희 가족이 모이니 굳이 교회 이름이 필요하지 않은, 언제 끝내야 할지 눈치보지 않고 말씀과 삶에 대한 자유로운 나눔이 가능한, 예배 중에 점심 식사가 이루어지는, 우리의 아이들의 신앙함이 우리 부부와 동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양을 잃어가면서까지 질을 고수하는, 그런 교회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교회 공동체를 '하고 싶다'는 표현이나 이런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싶다'는 표현은 너무 주도적이고 인위적이다. 그냥 이런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다. 그 '안'에 같이 있고 싶다. 목사로서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성도로서. 그럴 수 있다면 지금까지 신학함을 위해 달려 왔던 모든 시간과 노력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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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909355432418911&id=10000033388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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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수님 페이스북 글내용)


어차피 작년에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감출 일이 아니다. 교회 이야기다. 어제 우리 교회를 포함해 두 교회 간 '연합' 예배가 있었다. 그 교회나 우리 교회나 아직 교회 이름도 없는, 그야 말로 ‘이름 없는 교회’다. 서로 모르다가 알게 된 교회들이 아닌, 같은 뜻을 품고 처음부터 각각 교회를 시작한 사이다. 그것도 올해 1월부터 시작된 교회다. 각자 예배를 드리고 월 1회는 두 교회가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시작된 ‘연합 예배’인 셈이다.

작년 한해 우리 집 한 가정만 예배를 드리던 시기를 벗어나, 올해부터 3가정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4명이 10명으로 불어났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성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분리 없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나눔의 시간을 예배 시간에 갖고 기도하다 보면, 10시 반 예배가 대체로 1시 반 정도에 끝나고 어떤 경우는 2시 반에 끝나는 경우마저 있다. 한분의 목회자가 준비해온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아닌, 설교를 맡은 교우가 말씀을 나누고 나서, 그것에 대해서 다른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피드백 하는 방식의 나눔, 그것도 예배에 참석한 모든 교우들, 심지어 아이들도 그 나눔에 참석하니, 아이들 5명도 결코 부속품이 아닌 어엿한 교우들이다. 성가대도 없고, 영적 상징물도 없는 NGO 공간인데도, 그런 예배에 신기한 감동과 은혜가 찾아온다.

여기에다가 또 다른 교회와 함께 모이는 연합 예배 때는 아이들 포함해서 20명 정도가 되니, 그야말로 작은 예배 공간은 북적북적 ‘대형교회’가 된 셈이다. 어제가 그날이었다. 20명이 참석하니 10명 남짓이면 나누던 예배 시간 설교 후 교우들의 말씀에 대한 반응과 나눔 시간을 갖지 못하여 결국, 격월로 모시는 김근주 목사님의 설교를 끝낸 후, 식사 후 오후 기도제목 나눔 시간을 이어가다 3시 40분 경 억지로 모임을 끝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 오늘은 대형교회 느낌이 들었어요. 교우들이 많으니까, 예배 시간에 나눔 시간을 갖기가 힘드네요. 앞으로 교우들이 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배 시간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은 몇 명이 될 것 같나요?” 아내가 대답했다. “현재 3가정인데 오늘처럼 두세 가정 넘으면 힘들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하나? 아무래도 분리 독립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쵸? 분리 독립을 하든 처음부터 독립된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와 한 달에 한번 연합 예배를 드리던 말이지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어야하겠지요...” 아내가 대답했다. “그럼 연합을 할 교회들이 두 교회를 넘어 세 교회, 네 교회 그렇게 되겠네요.”

그런데 잠자코 있던 뒷좌석의 둘째 녀석이 끼어들었다. “아빠. 우리가 그렇게 분리 독립을 하는 교회 형태를 띠기로 했나요? 부모님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아이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우리가 그 녀석의 의아함이 더 의아했다. “민서야. 사람이 20명이나 되어 예배를 드리다 보니 예배를 통한 나눔이 충분치 못하니, 그것이 가능한 최적 인원을 정하고 그 숫자가 넘으면 다시 분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니? 어차피 생명이 있는 조직은 성장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늘어날 때마다 다 끌어안을 수는 없지 않겠니? 그럼 너는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어떤 그림을 가졌니?” 아이는 약간 당황해 하면서 대답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는 더 이상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 마음 속 품은 생각이 궁금했다. 오늘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저는 부모님들이 교회와 관련해서 ‘확대를 위한 계획’을 머릿 속에 미리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어색했어요. 저희가 이전 교회에서 나올 때와 같은 자연스러운 분화는 좋겠지만, 마치 얼핏 듣기로는 숫자와 양을 늘리는 것에 좀 방점이 찍힌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교회의 본질은 교우들 간의 교제와 하나 됨 같은 가치를 지키는 것인데, 양을 확대하는 것을 신경 쓰면 그런 본질적인 것을 잃기 쉽지 않을까 싶어서요. 물론 한국교회가 너무 위기이기에 이런 교회 형태가 확산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방식이어야지 인위적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이가 걱정한 부분의 취지였다.

이것저것 곁가지 걷어치우고 드는 생각은, “중2 아이에게도 새겨 들을 것은 있구나!” 싶었다. 숙성하고 숙성해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퍼져가는 것이 아닌, 선한 뜻을 위해서 시작된 프로젝트로 분주하고 희생하고 소진되는 일은, 작은 교회 속일지라도 왜 없겠는가.

언젠가는 우리 교회도 ‘이름’이 생길 것이고, 언젠가는 이런 교회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방문도 늘어갈 것이고 또 그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거쳤던 방법을 통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또 어쩌면 우리 중의 누군가가 분리 독립을 위해 나가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목표 중 하나이니까.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도 민서가 들려준 그 말, 교회의 본질,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나눔과 사귐을 희생하면서까지 ‘선한’ 사업에 분주한 것 그러다가 본질을 잃는 것, 양을 얻고 질을 잃는 것, 확산하느라 지킬 것을 잃는 일 만큼은 경계해야하고 또 경계해야겠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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