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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5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해서 다 잘한 게 아니다



아래는 "어머니, 전 교회 다니기 싫다고요"라는 한겨레신문 기사와, 해당 기사를 페이스북으로 퍼온 양희송님의 게시글에 달린 댓글들이다.

열심으로 댓글을 단 이들 중에 기사(혹은 현상)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근본주의적 이빨을 드러내는 사람만 너무 많다. 복음을 '전한다'라는 것에는 열심이 있는데(그것도 대단한 거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그리고 '왜' 전하는 지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생각이 없다. 그냥 시키시니, 까라면 까자는 건데, 그게 과연 하나님의 마음이며 생각이며 의도이며 뜻이었을까.

아니면, '전했다'라는 자기 만족과 위안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듣는 사람의 사정과 속내는 안중에 없는 것을 보니, 그건 해방케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Good News)'이 아니라, 선전하는 자의 자기 안정화 작업이며 따라서 자기 우상화 작업임에 틀림없고, 그 안에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고는 '하나님'이라는 세 글자 껍데기 외엔 아무 것도 없음이 틀림 없다.


자꾸 성경을 들먹이니, 성경이 말씀하는 바로 이야기하자면 이들은 다음의 성경 말씀에 대해 말 돌리지 말고 책임있게 답해야 할 것이다.
1) 강제적으로라도 우리의 마음 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 있는 그 분은 왜 굳이 힘들여가며 문을 노크하고 계시는가? (계 3:20)
2) 한 달란트 받은 사람, 까먹지 않고 한 달란트 그대로 잘 가져온 종은 왜 '악하고 게으른 종'인가? (마25:14-30)
3) 열심히 '주여 주여' 한 사람이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마7:21)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던 예수님의 명령을 '열심'으로 받들기 위함이 과연 양이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을 넘어서서 체하고 탈나고 질식해 죽을 때까지 먹이는 것인지 잘 생각해볼 일이다.


요는,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해서 다 잘한 게 아니다. 부르시고 시키신 이의 뜻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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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6123.html





어머니, 전 교회 다니기 싫다고요


[토요판] 가족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
오 주여, 그들의 전도가 폭력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나라 사람 둘 중 하나(53%)는 종교를 갖고 있대요. 통계청 집계입니다. 달리 말하면, 둘 중 한 사람은 종교가 없다는 얘기도 되죠. 그런데 집이나 학교, 심지어 직장에서까지 종교를 ‘강요’받는 일이 비일비재해요. ‘다, 너를 위해서’라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겐 그 얘기, 잘 안 들어와요. 되레 호감이 거부감으로, 혐오감으로 바뀌기 십상이죠. 종교 문제, 개인의 선택에 맡겨주면 안 될까요. 종교가 매력적이라면 믿고 싶은 사람, 절로 늘지 않을까요?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뭘 해줘도 잘 먹어서 좋아.” 회사 동료들은 말한다. “○○○씨, 특별히 까탈스러운 거 없잖아?” 친구들은 권한다. “○○○야, 너 이거 시켜서 나랑 같이 먹자.” 다른 ‘증언’이나 ‘증거’들을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다. 내가 까탈스럽지 않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거.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고모 손에 이끌려 간 교회에서 쏟아지는 성탄절 선물에 기뻐해 본 추억이 있고, 불심이 두터우신 할머니 뜻에 따라 절이 주관하는 캠프에 참여해 향 내음에 편안해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내 발로 성당을 찾아가게 됐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친한 친구들이 식사 전에 성호를 긋는 모습이 꽤 멋져 보여 따라갔던 측면이 크다.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다양한 종교를 맛본(?) 덕에 나에게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혼한 지 3년 뒤, 새벽기도 한 번 거른 적 없는 시어머니와 해로하시면서도 예배당에 발 한 번 들여놓으신 적 없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말이다.

‘은근한’ 전도는 시아버님이 중환자실에 계실 때부터 시작됐다. 의식이 없으신 아버님 손을 꼭 붙잡고 깨어나시라 찬송가를 부르시는 어머님이 어찌나 짠해 보이던지 나도 보탬이 될까 싶어 따라 불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버님을 고이 보내드려야 했던 그 봄의 어느 날, 어머님께선 환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애기, 너 나랑 같이 교회 가자. 어쩌면 찬송가를 그렇게 잘 부르니.” 교회를 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터라 “저도 성당 다니면서 불렀던 건데요”라며 슬쩍 넘겼다.

그러나 곧 ‘공세’가 본격화됐다. 혼자 남으신 어머님께 효도하는 길은 우리 부부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가족모임에 초대된 어머님 교회의 목사는 “남겨진 시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으면 교회를 다녀야 한다”며 우리를 불효자 취급했다. 전도사였던 시누이 남편은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외식 자리에서 “이제 교회를 다니셔야 합니다!” 침을 튀기며 웅변을 해댔다. 시이모님들도 동참하셨다. 시누이 남편이 경기도 외곽에 개척교회를 열던 날, 온 시가 식구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계속되는 강권에 지친 나로서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눈 껌뻑하며 신호 보내는 남편도 있고 해서 가만히 앉아나 있자 했다. 예배가 순조롭게 흘러가는가 했는데, 갑자기 연단에 서신 셋째 시이모님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치시는 게 아닌가! “△△△네 부부가 교회 다니게 해주시옵소서!!” 이때부터였다. 이들이 ‘폭력적’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나는 시종일관 “사람이 어떻게 누가 믿으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느냐” “종교를 가질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충분히, 분명히 표현해 왔다. 그런데 이들의 이유는 너무 단순했다. “너무 좋다”는 것이다. “뭐가 좋으냐”고 하면 “믿으면 모든 게 다 잘된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따지면 “안 믿어봐서 모른다. 일단 믿어보라”고만 했다. 너무나 억지스러워 대화하는 게 짜증이 났다. 일관되게, 딱 부러지게 거절했지만 이들은 포기를 몰랐다. 고통스러웠던 나는 이렇게도 호소해봤다. “전도 안 하고 가만히 둬 주시면 제 발로 교회 갈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기대한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교회 갈지도 모른다’는 말에만 방점을 찍고, 내가 잊을 만하면 기회를 엿봐 잽을 날렸다. ‘약속 있느냐’는 물음에 ‘없다’고 답하면, ‘어떤 교회에서 만나자’는 말로 시작해, 교회가 추진하는 봉사활동에 대한 자랑, 교인의 자녀가 잘된 사례 등을 읊어댔다.


믿는 게 효도다, 일단 믿어보라
믿는 사람들만 부자 된다…

딸이 태어나니 “안수기도 받으라”
찬송가를 불러주시는 어머니
당신들만의 만병통치약
날 병들게 하는 걸 아시나요


좋은 사례들만 줄줄이 열거하는 데 그쳤다면 ‘세뇌’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해해보려고 할 때마다 “성경에 흑인은 미개하다고 나와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 부자 된다” “부산에 물난리가 나고 큰 화재가 난 것은 절에 다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발언들로 ‘공들인 탑’을 그들 스스로 무너뜨리곤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이렇게 일관되게 무시하며 편협하기조차 한 이들이 권하는 걸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 이젠 ‘그 종교’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가 난다. ‘은혜’ ‘찬양’ ‘믿음’ 등 아름다운 단어들도, 그들이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싫은 지경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절친’에게 “내가 이상한 거냐”고 물었다. 친구는 딱 잘라 말했다. “시댁의 전도 방식이 잘못됐다”고.

하지만 우리 시가 식구들이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별세계에 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어머니나 개척교회를 운영하는 시누이네의 삶에서는 배울 점이 많다. 생활 속에서 소위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어머님의 팍팍한 인생사에서 종교가 큰 버팀목이 됐음도 잘 안다. 그러나 그들 ‘덕분에’ 이제 나는 그들의 선행조차 전도를 위한 미끼라고 강력히 의심하는 지경이 됐다.

이런 강권·세뇌가 판단력이 약한 나의 어린 딸을 향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딸이 태어나자마자 시어머니는 목사에게 안수 기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제가 안 믿는데 왜요?” 좋게 받아쳤다. 그랬더니 밑도 끝도 없이 “그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셨다. ‘나로도 모자라 내 딸인가’ 싶었다. “한 번만 더 강요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더니 이제는 나 없을 때를 틈타 아기에게 찬송가를 불러 주신다. 성경에, 찬송가 책에, 내가 자리를 비운 우리 집은 어머님 세상이더라는 ‘목격자’(아기 돌봐주시는 분)들의 ‘증언’이 쇄도한다.

이런 상황을 끝내보고자 남편한테 슬쩍 운을 뗐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자신의 어머니인데다, 본인도 고등학생 때까지는 열렬히 교회를 다녔기 때문일 터다. 외려 “당신이 싫으면 그냥 한 귀로 듣고 대충 넘기면 되지 뭘 일일이 반응을 하느냐”는 식이다. 지레 걱정이지만 ‘만약에, 만약에 내 딸이나 남편이 이 종교를 갖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할 것 같다. 나도 그들에게 강권할 것 같다. 제발 믿지 말라고. 내가 이렇게 된 데는 시가 식구들, 소위 ‘믿는 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들의 전도에 ‘배려’가 없었기에, 타인은 이를 ‘폭력’으로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하루속히 깨달아야 한다. 믿으면 부자 되고, 믿으면 자식도 잘되고, 믿으면 물난리도 안 겪는다는 당신들만의 ‘만병통치약’이 내게는 매우 아픈 ‘몽둥이’일 뿐이다.



종교의 자유를 갈망하는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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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님 페북에 달린 댓글들.



Shin HyunSoo 전도는 호객이 아닙니다. 이교회가 더좋으니 일루오라는거는 전도가 아니라 양뺏기이죠. 죽을 수 밖에 없는 너의 영혼을 예수가 희생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보의 제공 그럼으로써 신앙생활로 꾸준한 주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을 알려주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교회가 마케팅을 하면 교회의 인원은 늘어날수 있지만 영적으론 더 죽어가지 않나 싶은데,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마트가 아닙니다.

Lisa Jeong-hyun Nam 공감하게 되는 글입니다. 댓글에도 공감합니다. 전도할 때에 저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지혜로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보다가 기도도, 전도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감춰진 폭력(직무유기, 살인방조??)이긴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든 말든, 사탄의 노리갯감으로 살든 말든, 나만 나이스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남들과 부딪히지 않고 맘 편히 살면 된다는 것도 주님 명령과는 어긋나는 것이니까요. ^^ 최춘선 할아버지가 문득 생각납니다. 최근에 이메일로 복음을 전한 자매가 있는데 한 번도 교회에 가보지 않은 자매입니다. 그래서 더욱 다가가기가 조심스럽고 때론 자신이 없어질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 안에 그 자매를 향한 사랑 없음을 알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전도해야겠습니다. 근데 전도가 정말이지 말처럼 쉽지가 않고... 오직 구원이 성령으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고, 저야말로 기도도, 전도도 잘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삶에 비해 글만 많이 앞서나갔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Youngki Kim 사도행전 16장 25절-34절에서 사도바울과 실라는 삶으로 살아내고 행동해 내는 것을 통해 간수가 스스로 복음에 대해 질문하게 하고 그들을 초대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국 기독교는 먼저 살아내는 목회자들부터 절실하게 필요하며 폭력적인 전도방식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성경적인 전도가 필요합니다.

Jeong Seonghoon 교회에서 제공하는 커피..강제로 나눠주는 전단지..그 돈들을 모으면 굶주리는 생명을 몇명은 더 살릴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볼때마다 합니다.

Lisa Jeong-hyun Nam 그렇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렇게 했지요. ^^ 대중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해야 할 상황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먼저 관계를 맺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나눌 때도 있고, 치유와 기적 후에 복음을 전할 때도 있고... 사도행전과 사복음서를 통해 나타나는 복음 전도의 상황과 대상에 따라 방법도 달랐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다만, Youngki Kim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말로 전함과 삶으로 행함을, 곧 믿음과 행함을 따로따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삶으로 살아내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알맞은 때에 입으로 전하는 '성경적인 전도'면 참 좋겠습니다. 이 방법만 옳고 저 방법은 덜 옳거나 그른 것이다 말하기에 앞서서, 각 사람이 주어진 상황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함에 서로 공감하며 서로서로 북돋워주고 지혜로운 조언도 나누고 으쌰으쌰! 그랬으면 합니다. ^^ 서로의 전도 경험을 통해 도전도 받고 은혜로 나누면서요~~

Heesong Yang 저는 딱 한가지만 있으면 좋겠어요.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우리가 그걸 못해요. 할 말이 너무 많아서요. 상대가 내 얘기 듣고 싶을 때까지 들어줄 수 있는가... 그걸로 판단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설교만 하려고 하고, (심지어 자기가 설교를 잘 한다고까지 생각하죠) 상대 얘기를 들을 생각을 안하죠. 남과 대화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전도를 잘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Jonghwan You 오만하고 이기적인 기독교. 예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형용사가 왜 기독교에는 어울라는가...늘 고민입니다.

Lisa Jeong-hyun Nam 예수님은 치유도 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복음도 전하시고 설교도 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우리도 모두 다 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몸의 한 지체이기에, 한 지체가 모든 것을 다 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고 서로를 긍휼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구제에 더 마음이 가는 지체도 있고, 전도의 열정이 남보다 더한 지체도 있고, 기도에 특심이 있는 지체도 있고... 지역 교회들도 어쩌면 다 몸 안에서의 쓰임새가 다를 수 있습니다. 정성훈님 말씀처럼 굶주리는 생명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어쩌면, 길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던 그 교회가 또 한편으론 굶주리는 생명들을 살리는 데 귀하게 헌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만... ^^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지'와 '전도팀'이 아닌, 그저 우리 교회를 선전하는 '전단지'와 '홍보팀'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Samuel Lee 공강백배

Miran Kim 다단계를 하는 언니와 가끔 연락을 하며 지냅니다
그 언닌 물건 팔려고
전 전도 하려고ㅡ
이 글을 읽고나니 적어도 저는 '의도'없이 만나야 할 것 같긴 한데...
어렵습니다 ㅜ
페북통해 미처 생각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Sung-il Luke Kim 다단계라... 그리고 다단계를 닮은 종교라... 인간의 심리란게 다단계보다 더 복잡다단할테지요

Unhai Grace Pak 듣기의 중요함. 여기서 또 느낍니다.
기사의 경우는 정말 말도 안되게.. 뭐랄까.. 정말 비상식적인 상황이지만,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전도와 신앙 앞에서 타인에게 무배려하고 예의없긴 했으니까요.
저 기사를 읽고, 처음엔 격하게 공감하며 말 대신 삶으로 어필하는 예수쟁이가 되어야겠다 마음먹은 내 스스로에 조금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에 근심이..ㅠ
저렇게 전방위 압박을 가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누구와의 미래를 전제로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는 제한된 상황이 주어진다면, 이 또한 강압이고 어떠한 의미에서 폭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 저 불신자랑 교제중이거든요.

Sungchul Joseph Shin 전도에 관한 한 저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누구에게 강제적으로 전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그만한 사랑이 없었겠지요. 그것은 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전하지 않으면 어찌 들으며. 듣지 못하면 어찌 구원을 받겠느냐(롬10:14-15)."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전도의 긴박성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라(고전9:16)"라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진주를 돼지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귀중한 것이라도 그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내밀어 보아야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성경은 진주를 받은 돼지가 그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준 사람을 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가 그 돼지의 입장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그것을 바로 볼 수 있는 혜안을 달라고 기도해야 겠지요. 링크한 기사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참 쉽지 않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것인 줄 알기에 그것을 함께 나누자고 하는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으로 보여지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정말 폭력일까요? 우리는 자녀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구원의 손길을 뿌리친다고 해서, 구원의 손길을 거두어야 할까요? 그 자녀가 그것을 폭력으로 받아 들인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약에 정말 사랑하는 이가 절박한 위험 - 영생의 문제보다 더 절박한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 에 처해 있는데, 그가 그 절박한 위험을 모른다고 해서, 그를 외면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일까요? 예로 드신 다단계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전도는 사랑 -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겠지만 - 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욕을 먹는, 가끔씩은 자기의 목숨조차도 내어 놓아야 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으니 전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영혼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랑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너무 댓글이 장문이 되었네요. 혹시 무례하다고 느끼셨다면 그리스도인의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Yi Rang Iris Yim It's also twisting God's character. He's not forcing, but pursuing. Thank you for sharing.

임봉섭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할 따름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임봉섭 전도요? 당연히 해야하는거 아닐까요?

임봉섭 그리고 신문은 카톨릭이나 이슬람은 항상 엠바고 되고 기독교만 까이네요 다 모래알같아서 그런거 같네요

Jeong Seonghoon 전도 당연히 해야지요~하지만 그것이 강요가 되어버릴때 상대방에겐 폭력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강제구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우리가 참된 복음을 전할때 성령이 임하시면 그 영혼은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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