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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문창극의 강연과 관련한 단상들.
(2014/06/24 15:01 블로그 작성)
문창극의 강연과 관련한 단상들, 메모들.
뭐, 체계적으로 잘 쓰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체력의 고갈로 인해 귀찮아졌음.
문창극 강연 녹취록 전문을 보려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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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브리 민족이 경험했던 객관적 역사에 따른 해석의 문제(즉, 구약성서의 증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 이걸 문자주의적으로 보면, 히브리 민족이 겪은 객관적 역사 자체(모든 전쟁과 폭력을 포함)가 하나님의 뜻이자 행위.
2) 그러나 자기들이 겪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찌보면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들은 그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았다'라는 고백이 된다.
3) 게다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역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 즉 일제시대라 하더라도 모두 다 (유사할 수는 있으나) 각기 다른 경험에 의한 인식이다. 이는 개인의 시공간의 제한에 따른 인간 한계성에 의해서도 지지되며,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선이해'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사실상 '객관적 역사관'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다 '개인의 미시담론적 역사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 중에 권력을 잡은 소수가 지지하는 거대담론만이 특정 사관으로 체계화될 뿐이다.
4) 1)의 방식으로 우리가 보면, 하나님은 또 하나의 폭력의 근원이자 주동자가 됨.
5) 2)의 방식대로 보면,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 중의 하나인데, 하나는 '형이상학'이 되거나 또는 '현재적 동시성'이 된다.
6) 하나님의 뜻을 '형이상학'으로 보면, 이는 고쳐지거나 변개될 것이 아니므로 이는 처음부터 고정된 무엇이 된다. 또한 이 유효범위는 니체와 같이 '신은 죽었다'(물론 니체가 말한 신죽음의 의미는 이 용례로 보아선 안된다) 라고 선언하는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이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들을 수 없다. 하나님이 시작한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죄인일 뿐이다.
7)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 동시성'으로 보면,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취소되거나 반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언제 어디에나 모두 다 적용가능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개인에 따라 입장에 따라 적용가능한 하나님의 뜻이다.
8) '현재적 동시성'의 문제로 보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로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보편이라는 점에서 그러한데, 그렇다고 해서 보편적 존재의 특정 행위 하나는 특정한 컨텍스트 안에서 특정한 상대를 향하여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행위 자체가 보편적으로 적용되어 나에게까지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행위하면서 나를 부르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성은아 성은아'라고 부르시겠지.
9) 그렇다면 '현재적 동시성'의 문제로 하나님의 뜻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특정한 형태로 '이미' 결정되어서 결코 변개될 수 없는, 그리하여서 인간의 자유의지적 침범이 넘실대는 '역사'라는 배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추구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으로서, 인격신이라 고백되는 하나님 자신의 선성의 추구로서의 '하나님의 뜻'이다.
10)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일 수 없다. 마치 부모가 자신의 자식의 진로 문제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부모가 자식의 진로 문제와 관련하여 부모가 만족할 수 있는 방식이 '단 하나'일 수 없는 것과 같다. 직업의 귀천의식을 가진 몽매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자식이 의사가 되면 그 나름으로 좋고, 법관이 되면 그 나름으로 좋은 것이다. 바로 이 눈으로 말씀을 읽어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1) 물론 구약성서 저자들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형이상학적 전체'의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곧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서는 모든 '정답'만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곧 정답'이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고대인들의 우주관 역시 정당화되어야 한다. 주로 '창업'시 잘 팔리는 성구인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욥의 친구의 언설, 나중에는 하나님에 의해 모두 거부된 그 성구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다윗을 부추겨서 인구조사를 실시한 주체의 문제는 '반증'의 역할을 한다. 성서가 성서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정답'을 모아놓은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 마저도 하나님에 의해 용납'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구약성서 저자들의 시각이 마치 '형이상학적 전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보고 있다고 해서, 곧 우리도 그렇게 보는 것이 하나님에게 '정당하다'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2.
문창극은 강연 서두에 "그러면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제 나름대로 한번 찾아보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사가 제공한 자료 - 가히 '오리엔탈리즘'적일 수 있는 - 를 통해 구한말의 소위 '미개'한 상황에 대해 설명한 후에 1910년 한일합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데 그때도, 그러면 '왜 우리나라를 그러면 보호해 주셨으면은, 일본한테 합방하지를 않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이렇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요. 속으로. 근데 저는, 아까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한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세월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야,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락하신 거예요."
문창극의 역사관에서 조선 500년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게으르다'는 판단을 받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게으르다'는 판단을 내리는 기준은 무엇인가? 문창극에 의하면 개인위생의 문제 및 불합리한 관직제도 정도가 될 듯하다. 문창극에 의하면 그 '게으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가지고 오시는 해결책이 뭐냐면, 바로 '식민지화'이다. 이럴수가. 문창극의 '결과주의'는 하나님도 못 이긴다. 하나님의 판단은 문의 판단에 후행한다. 결과적으로 문이 본 것이 곧 하나님이 본 것이고, 문이 곧 하나님이다. 뭐야 이거.
3.하나님의 터치. 과연 니네가 안하면 하나님은 아직 터치하고 있지 않은 거냐? 과연 그게 창조주 하나님이냐? 늬들이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카드겠지.
4. 기회의 나라가 되기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을 이용해먹는구나.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도 이용되어야 하는 하나님. 이용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천국 창고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절대 주지 않을 하나님. 문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네.
5. 미국이 기회의 나라라고? 미국이 정말로 기회의 나라인가? 미국의 공교육을 보고도, 미국의 의료보험을 보고도 기회의 나라라고 보는 건가?
6.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열심히 해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듯. 일제치하의 문제는 - 물론 그것의 문제점은 명확하지만 - 전체 강연에서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까 '동북아 시대가 열렸다. 여기가 중심이다' 할 때 하나님은 '아, 한국을 써야 하겠구나, 한국을 다음의 세계의 중심 국가, 세계의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뜻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된다 이거예요."
"나라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되고, 힘이 있으려면, 경제도 부강해야 하고, 이런 게 골고루 다 있어야 돼. 그런데 그거 있는 데에, 하나님 뜻이, 지금 돌아보니까, 다 이해가 될 만하더라, 하는 걸 말씀드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정리해보면,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동북아에서 하나님에게 쓰임받기 위해 '단련'의 일환으로 일제치하를 겪게 되었고, 이제 많이 강성해진데다 신자들도 많으니, 좀 더 열심히 해서 미국과 같이 기회의 나라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더 열심히 하자'라는 게 강연의 주요 내용이겠네.
여기에서 문제는
1) 우리 민족의 도구화. 인간을 도구화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라 함은 곧 인간이 목적일진대, 인간을 도구화하여 얻게 된 발전과 성장에서, 과연 인간은 진정한 인간일 수 있을지. 일제치하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그 뜻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일제에게 갖은 고초와 수치와 죽임을 당한 우리네 조상들을 도구와 발판삼아 나서는 것이냐?
2)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무심. 식민지화와 전쟁의 폭력에 대해 하나님은 그저 '단련' 정도로 치부하셨을까? 폭력의 현실에 직면한 인간에 대해 그정도로 무심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인가? 그런 하나님이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고? 아~ 자기 아들의 죽음도 목격하셨던 분이니까, 전쟁이나 폭력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그냥 가벼운 '단련'이었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하나님을 그정도로 본다면,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았다. (1)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의 목격자라는 점에서, 폭력의 문제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처절하게 자신을 이입하실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약자의 편에 서실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대담론으로 국민들의 실제적 고통이라는 미시담론을 덮는 것은 실재하는 폭력에 대한 은폐이자 이 역시 폭력이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을 폭력의 근원으로 상정해버리는 처사다.
3) 기형적인 자문화중심주의이자 선민의식. 보통 이러한 중심주의 또는 선민의식은 타문화 혹은 타민족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는데, 문은 이 폭력을 알량한 역사적 서술 하에 은폐시킨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수행한다. 그 간에 일본은 어물쩡, '발전'을 대가로 면죄부를 받는다.
4) 하나님의 복 또는 뜻을 수량화하는 물신주의. 결과적으로 문이 주장하는 바는 문이 그토록 거부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와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문이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면서 바랬던 것 역시 결과적으로 '물'이었고, 공산주의가 달성하고자 상상했던 것 역시 '물'이었다. 물론, 적어도 공산주의에서는 '공평한 부'이기라도 했다.
5) 어설픈 신정론. '이미 이루어졌으니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건 전혀 설득되지가 않는다. (1) 인간의 자유의지적 행위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고, (2)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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