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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하나님의 통치가 정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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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정치적임을 의미하는가? 비록 그 단어의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정치적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논쟁들에 적용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현시가 어떻게 우리가 옳은 정치제도나 이상적인 경제 질서나 공정한 국가의 노동정책이나 외국 강대국들과의 올바른 관계들을 찾는데 도음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예수님은 자신의 시대의 사회구조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사실상 그의 시대의 로마 통치자들에 관해 비판적인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관심은 로마제국보다는 유대 땅인 팔레스타인이란 작은 세계이다. 그가 건설한 운동을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해방을 위한 혁명 조직으로 묘사하는 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는 열심당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할 때에 예수님은 피한다(요 6:15). 이 기록은 요한에 의한 전승의 '왜곡'이 아니며 또한 승리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도 아니다. 이 기록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그에 관해 아는 정보와 일관성이 있다.

그럴지라도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의 표현은 두드러지게 정치적이다. 문둥병자, 세리들과 죄인들,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로 선언하는 것은 적어도 그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그 선언은 단호하게 정치적인 진술이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심오한 불만족, 그것이 변화되기를 고대하는 열망을 표현한다. 그것은 분명히 마술과 같이 사람들이 처한 억압적인 상황들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상황을 하나님의 주권의지의 영역 속에 갖다 놓으며, 이로써 그것들을 상대화하고 그것들로부터 궁극적인 타당성을 빼앗는다. 그것은 사회의 희생자들에게 그들이 더 이상 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포로들이 아닌 것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통치의 실재와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운명과 다른 이들에 의해 조정되고 착취되는 것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의 형태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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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통치의 실재에 그들의 마음을 두고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며 가난한 자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기고 억압받고 상처받은 자들을 모아서 결국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그 사회 속에 있다면, 그것은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관점에 기초한 선교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들의 풍성한 인간성을 회복한 자로" 다시 서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 David J. Bosch, <<변화하고 있는 선교>>, 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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