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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신이 우선인가요? 종교가 우선인가요?"에 대한 내 나름의 썰.



(2015/01/14 20:21 블로그 작성)


SLR클럽 이슈토론방에 올라온 토론글에 대한 나의 댓글을 옮겨 놓음. 뭐, 좋은 글이거나 잘 쓴 글은 아닌데, 그냥 길게 쓴 게 아까워서 여기에 옮겨놔두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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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토론글 by redArrow)



신이 우선인가요? 종교가 우선인가요?

(출처: http://www.slrclub.com/bbs/vx2.php?id=discuss&no=50420)



저는.서슴없이.신이.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발제합니다

본인은 신은 있으나 종교는 무용지물이라는
이른바 유신론적.무종교주의자

여러분은 종교인이 교리를 떠나 무작정.신을.위한다는게.말이.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저처럼 종교란 쓸데없다 부처든 예수든 내맘에 모신 분이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특히.유일신 주의인 개신교나 이슬람교 여러분 말씀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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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나의 댓글.)





발제자와 참여자들 사이에 몇몇 오해들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 생각으론 이런 오해들이 '존재'라든지 '종교'라든지 하는 거대한 개념어에 대한 적확한 범주 설정 없이 사용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redArrow 님께서 사용하시는 '종교'는, 일부(혹은 다수)의 종교인들의 악행의 책임 소급을 '신'에게까지 가져가긴 좀 그렇고, 그래도 이 책임은 '종교'의 범위에서 져야하기 때문에 지목된, '신'의 하위 범주인 '제도적 종교'를 염두에 두시는 기획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신이 우선인가, 종교가 우선인가"라는 제목하에 신의 우선성과 종교의 무용성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유신론적 무종교주의"라는 역설적 개념어의 등장도 이와 궤를 같이 하는 듯 합니다. 혹여나 제가 redArrow님의 의견을 잘못 종합하였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먼저, '종교'에 대해 말해보자면, 사실상 이 '종교'라는 개념어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상당히 다양한 용례로 사용됩니다. 저는 개신교인이라 다소 개신교 신학에 국한됨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개신교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라는 개념어를 '일반 제도로서의 종교(즉,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의 차원과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종교'의 차원으로 나눕니다. 그러면서 '궁극적 관심'에 잇닿지 못하는 '일반 제도로서의 종교'는 모두 '악마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일반 제도로서의 종교'가 '궁극적 관심'의 심연에까지 다다르게 될 때에 그것은 '존재 자체'인 신과의 만남의 자리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또다른 신학자 본회퍼에게 있어서도 '종교'라는 개념어는 상당히 질 낮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자기폐소성 안에 갇혀진, 기계장치로서의 신, 써먹기 위한 신,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같은 신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닌 '종교'라고 하지요.

여하튼, 개신교 안에서만 보더라도 '종교'라는 개념어는 그 사용 의도에 따라 긍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종교'라는 거대 개념어를 보편적으로 '무용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데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도 어렵고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 바꿔 말하자면, 일부분 수긍하면서 동시에 일부분 미심쩍습니다. 이것이 '제도적 종교'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하더라도 제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도적 종교가 한 두개가 아닐 뿐더러, 하나의 제도적 종교 - 개신교라 하더라도 - 안에는 매우 다차원적이고 다양한 종교적 양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 다양한 양태들이 각각의 삶의 맥락 안에서 파생시키는 필/우연적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떤 종교적 양태들의 이러한 결과에 대해 반대한다고 하시면, 아마 그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선명하게 동의/반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종교'를 범주화한다면, '신에 대한 인간의 모든 차원의 인식/해석'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실상 "신이 있다는 가정" 역시 이미 '종교'의 범주 안에 들어온 것이지요. 물론 그 반대도 유효합니다. 저는 '무신론' 역시 하나의 '종교'라고 하는 본회퍼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것 역시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해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제 하에서는 "유신론적 무종교주의"라는 개념어는 모순이 됩니다. 이미 '유신론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종교'적 범주인데, 이와 동시에 '종교가 없다/없어야 한다'라고 하는 의미가 될테니까요. 칼을 쓰면서 '칼을 쓰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에는 우선성에 대해 제 생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사실 앞 내용과 연결된 것이긴 한데,,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인간이 만든 종교' 사이의 우선 여부는 '범주의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표현에 등장하는 '존재'라는 개념어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의 용어입니다. 즉 인간의 인식론의 범위에 굳이 제한되지 않은 채 물자체로서 존재하는 신.입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틸리히에 의하면 신을 '존재자'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신을 인간의 인식 안에 제한시켜버리는 것이라고 하여, 신을 '존재 자체'의 위치에 규정해놓긴 합니다.) 문제는, 이 '신'의 범주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주관적 인식 안에 가두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적 이성 안에서 각종 연산작업을 통해 무언가와 비교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을 말할 때에는 항상, '스스로 존재하는 신'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 안에 제한된 방식으로 해석된 신'으로서 말해집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머릿 속으로 이것이 신이다!라고 떠올리는 그 순간부터, 이미 그 머릿 속에 그려진 신은 '신 그 자체로서의 신'이 아니라, '인식된 신, 해석된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인식된 신, 해석된 신'은 결국 인간 주체에 의해 인식/해석된 것이므로, 곧 제가 범주화한 '종교'라 불러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이 우선인가 종교가 우선인가"라는 질문은, 백 번 양보해서 존재론적으로 신이 우선이라 치더라도, 인식론적으로는 종교가 우선이게 됩니다. 아니, 이 질문에서 말하는 '신'이 각 인간주체의 인식 안에 인식 내지 해석된 것으로서의 '신'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일테고, 따라서 위 질문은 "종교가 우선인가, 종교가 우선인가"라는 질문으로 읽힐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양단간에 우선성을 따질 문제가 아닌, 동어반복적 질문입니다. "A가 먼저인가, 영어 알파벳 맨 첫 글자가 먼저인가"와 같은 질문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무엇이 우선인가' 물어도 적절한 대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존재론적 우선성을 묻는 것인지 인식론적 우선성을 묻는 것인지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설령 그것이 존재론적 우선성을 묻는 것이라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 의거한 바, 경험 세계에 근간한 인간의 이성으로 존재론적 존재를 파악할 수나 있는 것인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즉, 밸붕이라는 얘기지요. 존재론적 의미의 신은 인간 이성 너머의 어떤 것이고, 종교는 그것이 제도적인 의미든 인식론/해석학적 의미든 인간 이성에 국한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저러나,, 이러한 big question을 던지신 redArrow 님의 전반적인 기획에 대해서는 상당히 찬동하는 바입니다. 다른 종교는 잘 모르겠고, 현재 한국 개신교는 '특정 종교적 양태'의 폐소성에 빠져, 외부적 '신'과는 단절된/단절시키는 형국이란 생각입니다. 몇 해 전까지는 그나마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글쎄요, 과연 한국 개신교에 희망이 있을까 싶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악을 배출해내는 구조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차라리 redArrow 님처럼 '무종교주의'를 선언하는 것이 더 '신'에게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정치인들은 모두 쓰레기니까 정치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말입니다.

긴 글 죄송합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발제하신 분과 참여하신 분들 모두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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