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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혼전 성관계 관련한 토론의 아주 일부분에 대한 꼬투리 잡기식의 단상.



(2015/03/16 23:12 블로그 작성)


청어람 영서 독회 첫모임에서 토론하다, 토론의 주제가 '기독교적으로 옳고 그름은 무엇인가'로 튀었다가, 최근 혼전 임신 및 아기를 지키기로 한 유명 십대 여사업가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의 결심이 혼전 임신에 대한 미화로 확대될 것을 경계하여 '혼전 임신은 하나님 앞에 죄'라고 밝힌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혼전 성관계'의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혼전 성관계는 기독교적인 죄인가 아닌가를 이야기하다, 나중에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넘어갔다.

다행히(?) 이를 무조건적으로 죄라 여기고 그 근거를 '우리 목사님이 그랬어'라는 이들은 없었다. '책임'의 문제, '상처와 아픔'의 문제로 다가가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난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아쉬움을 느낀 지점은, 왜 그 이야기를 '설교'라는 채널을 통해서 해내야 하는 것인가. 이다.

좌석자들 중에서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기독교적으로 바라봐야 할 관점을 제공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 심정은 공감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 생각해볼 수 있는 두 가지 예가 있다.

첫째는 '선교사 체위'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인지 아메리카 원주민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서구 백인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이 후배위로 성관계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이 정욕에만 밝은 짐승의 모습과 같다는 이유로 종교적으로 금기시하고(꼭 '죄'란 종교적 레토릭을 써야만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바른 정자세'로 성관계를 나눌 것을 전도(!)하였단다. 이것이 바로 여성이 아래에 눕고 남성이 위에 누워 서로 배를 맞대로 삽입하는 '선교사 체위' 혹은 그리하여 '정상위'라는 말의 유래이다. 서구 백인 선교사들은 나름의 관점에서 비신앙인들의 '문제점'을 보았고,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일괄적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둘째는, 얼마 전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일인데, 어디였더라, 학복협 비슷한 집단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들이 세미나를 가지면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스킨십의 아주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던 적이 있다. 스킨십은 어디까지, 애무는 어디까지가 기독교인들의 바람직한 스킨십의 '적정선'이라는 것이다. 아마 '뽀뽀'까지가 바람직한 스킨십의 적정선으로 제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두 가지 예들이 정말로 멍청한 짓인 이유는, 첫째로, 이들은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기준"을 상정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기준을 밝히 보여주면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준을 "지킬 것"이라는 나이브함 때문이다. 생각은 우리가 했으니, 너네는 생각하지 말고 지켜라. 하는 식이다. 셋째, 그들이 어떤 경험을 겪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이 세상의 혼전 성관계는 모두 자신의 정욕과 쾌락에 자발적으로 도취되어 자기의 의도와 방식과 의지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기준을 밝히는 그들의 의식 아래에는 '결국, 니가 유혹을 못참고 니가 '하는' 거잖아.' 라는, 지독히 폭력적인 전체화가 깔려 있다.

다수의 군중을 앞에 놓고 하는 설교에서 '섹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다수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타당한 기준, 도덕, 윤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필요는 하겠지만,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성을 악의 근원으로 보려는 금욕주의적 태도나, 대외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섹스에 대해 논하는 것을 쿨내 진동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프리섹스주의적 태도를 논외로 한다면, 우린 그 중간 지대에서, 다수의 복잡다단한 회중들을 앞에 놓고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설교가 뭐길래. 꼭 설교에 녹아들을 수 있어야지만 기독교적이 되는 것인가. 난 이 문제를 굳이 설교라는 커뮤니케이션 채널에 정위시키려 하는 그 숨은 의도가 더 폭력적일 수 있다고 본다. 개인간의 신뢰 관계 안에서 행해지는 상담을 통해서 충분히 가능할 것인데, 이를 수면 위로 이끌어 올려서 미개한 원주민들이 '정상'적으로 성관계를 가지게 하려는 (더욱 미개한) 서구 백인 '성'교사들이 되려고 자처하는, 그래서 설교자 자신의 영향력이 각 사람의 침실에까지 미치게 하기 위한 자기 확장적 모티브가, 나는 더 무섭다. 굳이 이 문제에 대해 설교를 해야겠다면, 사랑에 대해 설교하고, 사랑하는 방식으로서의 섹스, 욕구충족을 위한 상대방이 도구화에 대한 거부 선언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다. 앞뒤 다 잘라먹고 그저 섹스만 이야기하다보면, '어디까지 해야됨' 식의 폭력적 도덕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홍혜선 같은 이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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