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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동성애는 죄인가?"에 대한 본인의 입장 정리.






동성애는 죄인가?



1. 시작하는 말.



몸통을 드러냄 없이 그저 한 두 마디의 조소적 미메시스의 남발은 완고한 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양단 간에 세워진 두터운 벽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따라서 동성애와 관련한 주제가 부각될 때, 그저 한 단편만 이야기해서 서로간의 오해의 벽을 더욱 공고히 세우는 우를 범치 않기 위해, 보다 일관된 방식으로 주장과 근거를 친절하게 보여주어야 할 때 "써먹기 위해" 글을 써본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죄'라는 단어는 기독교적 개념 안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다. 곧,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 정도로 보면 될 듯 하다. 물론 메타전제적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모두 죄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생산해내는 모든 유무형의 가치들은 '죄'(혹은 '불완전성'에 의해 야기되는, 그리하여 초월인 하나님을 유한한 범위 안에 제한시켜버리는)와 뗄레야 뗄 수 없음은 주지의 진리이다. 사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유무죄 판정'의 시각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있는 접근이긴 한데, 왜냐하면 아무리 '무죄'라고 결론내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정용어인 이상 '유무죄 판정' 이전에 "뭔가 문제가 존재한다"라는 가치판단을 이미 깔아놓은 상태에서 내려진 재판부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더 큰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하여 겁대가리 없이 이 글을 쓴다.

이 글이 갖는 한계는 아마도 전체 '퀴어'의 범주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모두 다 커버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아래에서도 언급하지만 전체주의적인 시각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그냥 '동성애자'(레즈비언과 게이)의 경우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다. 그러나 상당 부분 소급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2. 동성애의 이해



1) 범주 구분


제목을 '동성애의 이해'라고 붙였다고 해서 겁먹지 마시길. "해봐야 안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동성애를 너무나도 일반화시켜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일반화 경향은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 대번에 드러난다: "이성애는 죄인가?"

만일 우리가 '이성애'에 대하여 '죄'가 아니지 않나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죄'인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좀 헷갈려진다면, 그리하여, '에이, 케바케로 생각해야지'라고 말하고 싶다면, 적어도 동성애를 바라보는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렇다! 이성애 그 자체를 두고 죄다 아니다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별할 '전제'가 드러나있지 않아서이다. 이렇게 물으면 좀 더 쉬운 대답이 가능해진다. 싱글인 남자와 싱글인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충실하게 사는 것은 죄인가? 그게 무슨 죄야. 차라리 하나님에 의해 보증되는 '권장사항'이라고 하면 모를까.. 그런데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성폭행 했다면 이 남자의 이성애 행위는 죄인가? 당연히 죄다.

'이성애'라는 범주 안에는 수많은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즉 어떤 특정한 이성애 행위(그것이 꼭 섹스일 필요는 없다)는 항상 그 정황이 그 행위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결혼한 남녀 사이의 서로 간의 따뜻한 사랑 고백은 무죄이다. 그러나 결혼한 사이라고 해서 남편이 아내를 자신의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면, 그것이 결혼이라는 공적 제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유죄다. 사회법적으로는 부부간 강간으로 처벌받기는 어려울 수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살리고자 하는 한 인격체를 '도구화'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적이지도 않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유죄'다.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경우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이건 성경에 나와있으니 반칙성 질문인가..) 나이트에서 처음 본 이와의 사랑 없는 섹스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굳이 섹스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여자가 싫다는데도 자신의 집착적 만족을 위해 그 여자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남성의 플라토닉한 이성애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한 달에 한 번씩 애인을 바꾸는 남자 혹은 여자의 이성애는 정당한 것인가? 도저히 애인 없이 혼자 지낼 줄을 모르는 남자 혹은 여자의 경우는? 양다리의 경우는? 여러 판단의 근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행위는 결코 십자가 신앙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필자의 준거틀을 좀 더 거칠게 적용해본다면, '이성애'라는 범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사자 간의 사랑에 의한 이성애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가 그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준거틀이 있을 수 있겠고, 필자의 준거틀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므로, 다른 방식의 더 많은 갈래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이성애를 '전체주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이성애 자체가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규정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범주 구분은 동성애에 대하여도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로 구분되어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향후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다음과 같이 표식화한다.


(ㄱ)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이성애
(ㄴ)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

(ㄷ)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
(ㄹ)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




2) 범주 구분의 타당성 문제


물론 이 범주 구분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소위 말해 (ㄷ), 즉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냐? 그냥 지들의 죄된 습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놓는 핑계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최소한 '불가지론("우리는 알 수 없다!")'을 외쳐야 할 곳이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1) 동성 지향의 선천성 문제


첫째, 과연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은 선천적인 것이냐 - 즉 '동성애자'로 태어난 사람이 있느냐 - 에 대한 완전한 답은 현재로서는 불가지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실 이 부분이 동성애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첨예하게 입장이 갈리는 부분이다. 동성애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창조하지 않으셨으므로 동성애적 지향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다들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동성애자'는 뭔가 잘못된, 문제가 있는 존재들이며, 따라서 이들은 그들의 문제를 바로잡고 '회복'되어야 될 대상이다. (ㄷ)이 가능하다고 하는 건 마치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햄버거를 끊을 수 없다고 칭얼대는 무분별한 관용주의이다. 그러나 만일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라면, 즉 동성애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동성애자'들은 뭔가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이성애자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인정된다. 마치 생머리로 태어난 사람에 비해 곱슬머리로 태어난 사람의 머리카락 형질을 그 사람의 죄로 따져 물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ㄱ)이 가능한 한에서야 (ㄷ)이 불가능할 리가 없으며, 하나님은 동성애자에게 동성애적 성적지향과 관련하여 아무런 잘못된 부분을 찾지 않으실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성애적 성적지향이 과연 선천적인 것인가, 혹은 굳이 선천적이지는 않더라도 개인이 임의적 욕망에 따라 거스를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동성애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그 입장을 개진한다. 즉 창세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는 문자적 기록을 그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는 쉽게 반박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경에는 '손톱은 자라나도록 창조되었다'라는 문자적 언급이 없다고 해서 '자라나는 손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현상이 아니며, 고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성경과 관련해서는 아래에서 보다 더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좋겠다.

현대 의학은 이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가? 미국 정신의학 협회(APA)에서 발간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증상에 대하여 그것이 정신질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전세계적 교과서가 바로 DSM이다. 이 책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DSM-I, 1952)에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보았다. 즉 동성애적 지향성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 질병의 결과로 본 것. 그러나 1994년에 출간된 DSM-IV부터는 동성애를 더이상 정신질환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즉, 동성애의 선천성이 상당 부분 인정된 것. 현재는 2012년에 나온 DSM-V가 최신 버전이다.

물론 '학계'라는 것 자체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딱 하나의 불변하는 '절대이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끊임없는 헤게모니 싸움의 산물로 읽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 의학이 말하는 것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보았던 DSM의 입장이 바뀌게 된 주요한 이유가 '동성애자들의 엄청난 로비' 때문이라는 확인 안 된 이야기에 혹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되겠다.(가만 생각해봐도 동성애를 정신질환화하려는 쪽의 로비가 훨씬 더 강할 듯 한데..) 아무튼 적어도 현대 정신의학계에서는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보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단서들이 달려있다. 모든 정신과 의사들이 이에 100% 다 동의하냐? 아니지.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아주 미미한 숫자도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정신과 의사들의 소견에 따르면, 동성애는 '정신 질환'이 아니다. 그렇다면 동성에 호감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동성 지향을 가지고 태어난 거냐? 그런 것도 아니다. DSM-V에는 '성 정체성 장애'라는 용어를 '성 불쾌감'으로 대체하는데, 이 용어는 "자신이 다른 성으로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해 고통을 겪는" 증상을 지칭한다. 즉, '동성에 대한 지향성'이 무조건 '선천성'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이유(예를 들어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날 수도 있다는 것. 이러한 사실이 '선천적 동성 지향'의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해야 하겠다. 다니엘 헬미니악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늘어나는 과학적 증거를 살펴보라. 사람들이 게이나 레즈비언이 되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동성애가 그 자체로 어떤 식으로든 불건전하다고 할 만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증거도 없으며 동성애 성적지향을 마땅히 바꿔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논증도 아직 없다. 사회학, 심리학, 생물학적 증거들은 모두 점점 더 확실하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실은, 몇몇 사람들이 그저 우연히 동성애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헬미니악, 9)

또한 그는 발췌된 부분 중 '성적지향'이라는 용어에 대해 각주를 달아 설명한다.

어떤 개인이 남성과 여성 중 누구에게 성적으로 끌리는지를 나타내는 용어. 성적지향은 크게 동성애와 양성애, 이성애의 스펙트럼으로 나타낼 수 있다. 개인의 성적지향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아주 어릴 때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확립된다는 데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헬미니악, 9, 각주14.)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확실히 안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매우 좁혀질 수 밖에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 지점이 "불가지론"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동성 지향에 대한 선천성? 과학이 점점 더 발전하면서 우리가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지긴 했지만, '확실성'의 차원에서 보자면, 아직까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진리의 차원에서 우리가 동성 지향이 선천적인지에 대한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 없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모든 지혜보다 승한 '성경'에 근거해서 특정한 생물학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다루도록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필자는 창조주가 아니기에, 창조주가 그렇게 했던 것이면 그런갑다 하는 것이고, 창조주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런갑다 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외계인의 존재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는데, 미래의 어느 순간에 외계인의 존재가 확인된다면, '성경에는 안 나와 있으니 거짓말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아, 하나님의 창조의 범위에 외계인도 포함되는 것이었구나'라고 해야 한다는 것. 요는,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확하게 어떻게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알 수 없다". 만일 동성 지향이 선천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실수'로 그렇게 창조하셨는지, 아니면 전혀 실수가 아닌 채로 그렇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 역시, 우리는 "알 수 없다".


(2) 동성 지향과 이성 지향 사이의 모호성 문제


둘째, 동성애적 성적 지향에 대한 내용을 담은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딱 부러지게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오히려 성적 지향의 문제는 '정도'의 문제로 해석된다. 킨제이는 그의 연구팀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심도 있게 인터뷰한 이후, "사람들은 완전한 이성애자나 완전한 동성애자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면서, 7가지 분류법을 개발했다. 분류들은 다음과 같다. (0) 동성애가 없는 완전한 이성애, (1) 주로 이성애, 부차적인 동성애, (2) 주로 이성애이지만 부차적이지 않은 동성애, (3) 이성애와 동성애가 동등, (4) 주로 동성애이지만 부차적이지 않은 이성애, (5) 주로 동성애, 부차적인 이성애, (6) 이성애가 없는 완전한 동성애, (x) 성적 접촉이나 반응이 없음(무성애). 이러한 킨제이의 연구결과는 성적지향에 대한 기존의 이분법적 시각을 폐기처분시켰다. 개인의 성적 지향은 두 개의 극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성적 지향을 굳이 '섹스'로 환원할 수는 없다. 즉 대부분의 이성애자들 역시 아주 약간이라도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곧 '동성과 섹스하고 싶은 욕구'로서 읽어낼 수는 없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헬미니악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섹슈얼리티는 신체적 각성과 오르가즘 이상의 것이다. 사람의 섹슈얼리티에는 애정을 느끼는 능력, 다른 사람 때문에 기뻐하는 능력, 다른 사람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는 능력, 그리고 그 사람에게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능력 등이 결부되어 있다. 섹슈얼리티는 경이로운 이간의 경험인 사랑, 곧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다른 사람에게 매우 강하게 끌려서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에게 이롭도록 순순히 자신의 삶을 맞춰 나가는 행위의 핵심이다. (헬미니악, 8)

철학자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헬미니악이 '섹슈얼리티'라고 언급한 것을 '성애(eros)' 혹은 '성애력(erotic power)'이라고 표현하면서 "만족에 대한 내재적인 감각으로서의 진정한 감정의 힘, 즉 한 번 경험하고 나면 우리 삶의 모든 양상에서 그것을 실현시키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단지 '섹스' 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 카터 헤이워드(Carter Heyward)는 이러한 성애(eros)를 하나님, 즉 관계 안에서의 연결과 상호성의 힘으로서 우리 가운데 움직이는 거룩한 힘으로서의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성애가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면, "성애는 우리로 하여금 억압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무감각해짐을 쉽게 수용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성애는 우리를 무기력의 감각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며, 타자를 이용 및 악용하는 것을 막아준다. 성애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현존(present)한다는 것을 느끼기를 요구한다."

이와 같이 '성애'를 단순히 '섹스'의 범주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동성 간의 의리와 우정 역시 '성애'의 범주에 충분히 들어오고 남음직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지향 지수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ㄷ)의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해 '동성애가 얼마나 문란한데!'라는 생각으로 (ㄷ)의 관계, 즉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할 분들을 위해서는 뒤에서 좀 더 심도있게 논의할 것이다. 혹은 성경을 기준으로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의 불가능성을 논하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제 곧 다루게 될 것이다.



아마 이 범주 구분의 최약점은 (ㄱ)과 (ㄴ) 사이, 혹은 (ㄷ)과 (ㄹ) 사이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도구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위험한 이야기지만 도구화 과정에도 사랑이 아주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도구화된 피착취자의 입장은 별개라는 점에서, 도구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님. 사랑과 '집착'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정도로 이해바람.) 그러한 점에서, 이 범주 구분은 어디까지나 '무엇이 얼만큼 주도적인가?'라는 질문 이후에야 유효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서 논할 때, '동성애자는 다 똑같다'라는, 전체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된 전제로 삼고,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3. 성경과 동성애



기독교인으로서 모든 판단의 준거점은 '하나님'이며,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순수한 확실성을 존재론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기획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가정된 전제 안에서 실패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하나님은 '직접' 답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신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답을 '성경'에 근거하여 유추해볼 수 있다. 성경을 펴보면 다름 아닌 '한글'이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바,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의 진술들을 확인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이전에 고려되어야 할 지점은, '과연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이다. '동성애' 관련 표현이 나오는 본문만을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의 태도로 확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 범위가 더욱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두 부분을 모두 고려해보겠다.


1) '동성애' 관련 표현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의 경우.


'동성애'관련 표현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의 경우는 (1)창19:1-29(소돔과 고모라 본문), (2)레18:22, (3)레20:13, (4)롬1:27, (5)고전6:9, (6)딤전1:10 이다. 물론 신명기와 열왕기상하에서 "남색하는 자" 혹은 "남창"을 언급하는 부분도 포함시키려는 이들도 있지만, 헬미니악에 의하면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에서부터 비롯된 오역이며, 히브리어 /qadheshim/은 '헌신된 자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 헌신은 이방 신들을 향한 헌신이었고 그들의 신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헌신이었다."(헬미니악, 178) 아무튼, 문자적인 측면에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동성애'라는 문자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것을 어렵잖게 '죄'의 목록에 올려놓는다. 그렇다면 성경은 동성애를 죄로 본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자적 성서 해석을 일삼는 이들을 제외한) 많은 성서학자들은, '동성애'를 지칭하는 성서 본문이 정확히 '동성애' 자체를 타겟으로 삼아 정죄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데에 동의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하나님이 분노했던 지점은 동네 불량배들이 손님들에게 "우리가 '상관'해야 하겠다"는 대목이 아니라, '손님에 대한 소돔성의 냉대'(대표적으로 Sherwin Baily, Victor Furnish) 혹은 그날 밤 롯의 죄 없는 두 딸에게 행해진 가혹한 '성폭행', '살인', 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인간을 도구화함', 그리고 그에 대한 '무관심'(대표적으로 James Nelson)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논증이 이미 오래 전부터 소개되어 왔다.

또한 레위기와 로마서 등지에서 언급되는 동성애는 사실상 이방 종교의 '우상 숭배 행위'를 지칭하는 '대명사'로서 사용되었다는 논증이 이미 많이 소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John Boswell) 고대 가나안 이방종교에서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는 방법이 신전에 가서 사제(남창)와 동성섹스를 하는 것이었다는 점(John Boswell)에 기인하여, 동성애에 대한 신구약의 부정적인 태도는 '동성애'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동성섹스' 행위가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당시의 컨텍스트인 '우상 숭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이해해야 보다 더 문맥에 맞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노골적으로 지적해보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내 남편이 여자를 끼고 놀았어"라고 한다면, 열이면 아홉 이상, "바람피는구나"라고 어렵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여자 끼고 논다"라는 것은 일종의 '숙어적 표현'이라, 일반적인 경우에 이 표현은 '바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숙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일종의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여자를 끼고 논다'고 해서 봤더니 4살난 딸(여자)을 안고(끼고) 비행기를 태워주는(노는) 식의, '불통'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둘 다 문자적으로 '여자를 끼고 놀기'는 했어도, '여자를 끼고 논다'라는 표현이 지칭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비슷한 '불통'의 상황이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 본문의 경우에도 발생한다. 성서에 문자적으로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죄"라고 쓰여있다고 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동성섹스", 더욱 소급하여 "동성애"로 치환하여 독해하는 것은 '비약'이라는 것이다. 성서의 문자적 표현을 '동성애'와 동일선상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사회문화적 정황이라든지 당시의 언어적 사용의 문제라든지 등에 대한 논리적 갭들이 충실하게 메워져야 한다. 성서의 이 표현들은, "바람 피우는 행위"를 "여자 끼고 노는 행위"라고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악된 어떤 특정 행위의 한 면을 묘사하는 '숙어적 표현'일 수 있으며, 이러한 숙어적 표현이 지칭하는 죄악은 바로 당시에 매우 성행했던 "우상 숭배", "이방신 숭배"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특별히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 등장하는 동성애 관련 표현들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학대적 섹스'를 언급하는 지시어로서 사용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Victor Furnish, Robin Scroggs) 기원 후 1세기 로마제국의 도덕적 퇴폐와 함께 남성시민들은 넘쳐나는 여성 매춘 외의 새로운 경험을 맛보기 위해 젊은 남자 또는 어린 소년을 노예로 사들여 성적으로 학대했다. "남자(시민)들은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고 노예들을 소유했고 그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 매력적인 소년과 소녀들은 납치되어 성적인 노예로 팔렸다.(이것이 디모테오 1서 1장 10절에 나오는 죄악 목록 중 "/arsenokoitai/"(남색하는 자) 다음에 "인신매매를 하는 자"가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헬미니악, 163-164). "그러므로 기원 후 1세기 도덕주의자들이 동성 간 성행위에 반대하며 단죄한 대상은 착취와 불평등, 성적 학대, 정욕이었다. 그것은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마찬가지로 로마 사회에서 단죄하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arsenokoitai/"가 정말로 남성 간 섹스를 가리킨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 용어가 모종의 학대적인 섹스를 단죄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헬미니악, 164)

또한 어떤 학자에 의하면 성경은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성경이 동성애에 부정적인 주된 이유는 다분히, 동성애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이자 자산인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당시 히브리민족적 사회문화의 특성에 따라 기피되었다는 논증이다. 이것은 대를 잇기 위해 형수와 관계하다 땅에 설정하여 저주를 받는 '오난'의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생명이 담긴 정액을 낭비하여 부족한 노동력과 인구를 확충하지 '않는' 행위는 그것이 동성섹스이건 질외사정이건 "사회적 이유"에 의해 정죄당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정죄'가 곧 '하나님의 정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Daniel Helminiak, James Nelson)

정리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동성애'에 대한 혐오스런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 본문들은 모두 '우상 숭배'에 대한 혐오, '폭력'과 '도구화'에 대한 혐오 등으로 치환하여 읽을 수 있는 근거들 - 단지 근거들만이 아니라, 그렇게 치환해서 읽어야 보다 문맥에 상통하는 본문의 뜻이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대표적으로 퀴어비평가들) - 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선이해 없이 그저 한글로 된 신구약을 읽고 '성경에 보니 동성애는 죄라고 나와있네'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이다.


2) '성'과 관련한 성경 본문의 경우.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성서는 '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역시, 구체적인 레퍼런스는 없지만,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동정녀'로 표현한 점,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았던 점, 예수님이 언급한 '천국을 위하여 고자된 자', 바울도 '독신'의 장점을 주장한 점, 바울이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1-2)라고 한 점,... 등등을 고려할 때, 기독교 초기 교부들이 본 대로 성경은 '성'을 상당히 부정적인 눈으로 본다! 고대 기독교의 기틀을 마련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원죄론이 유전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원죄가 유전되는 통로가 바로 '섹스'를 통해서였다고 보았다.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이 행위를 통해 '원죄'도 함께 유전된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니 '섹스'를 통해 태어난 신생아도, 그들이 무언가 '자범죄'를 짓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섹스'라는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 존재하게 된 만큼 그 존재 자체는 '죄'에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순수하게 성경을 읽고 순수하게 성경을 믿는다는 생각으로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말씀한다'라고 하려면, 동일한 의미에서, '성경은 '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본다'라고 말해야 한다. 동일한 관점에서 '이성애' 역시 부정적으로 보아져야 하며, 섹스는 단지 "자식을 생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만 행해져야 하며, 그러한 필요 이외의 섹스는 엄히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타당하려면, '가정'이라는 제도와 '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여 창조 세계의 역사를 지속시키시는 하나님을 걸고 넘어져야 한다. 과연 성경이 일부분에서 '성'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해서 '성'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부정적인 것인가?

이러한 모순에 대해, 헬미니악은 이렇게 말한다. "실수는 성서를 읽는 방식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3) 성서 안의 반례!


동성애 논쟁에서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성서 본문이 있는데, 바로 마태 8:5-13과 누가 7:1-10에 평행으로 등장하는 '백부장의 종 치유' 본문이다. 헬미니악은 두 평행본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예수님이나 성서 기자가 그를 부를 때(종, doulos)와 백부장이 그를 부를 때(하인, pais)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 차이와,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들어, 그 종은 부유한 백부장의 성적 노예이자 연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틀림 없이 '동성 연인 관계'로 보았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남성 간 동성애 관계를 눈 앞에서 마주치셨던 성경 기록 속의 유일한 사건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을 분만 아니라 그 젊은이를 건강하게 만들어서 백부장에게 돌려 주시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헬미니악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살펴본 똑같은 교훈이 여기서도 뚜렷하게 나온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할 때에는 사물을 그것들이 존재했던 역사적 맥락 가운데서 이해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우리의 견해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시던 세계에 투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실, 동성 간 성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던 세계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틀림없이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성애 관계를 단 한 번이라도 문제 삼으셨던 그 어떤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분께서 그것을 눈 앞에서 마주치셨을 때조차 말이다." (헬미니악, 195).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동성애를 '인정'하셨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헬미니악은 이렇게도 덧붙였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성애가 괜찮다고 생각하신 걸까? 물론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밖에는 알지 못한다."(헬미니악, 194).



4) "성서가 '영감'되어 기록되었다"는 말의 의미.


보다 충실한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성경의 존재론적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적어도 유기적 영감설이나 칼 바르트의 실재적 영감설에 의하면, 성경은 그것을 기록한 저자를 완벽하게 배제하고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음성만을 담아놓은 책은 아니다. (이것이 필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성경'을 굳이 구분했던 이유이다!) 인식적으로 한계지워진 인간에 대한 관념론적인 썰을 굳이 풀지 않더라도, 성서는 어쨌든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고, 그 말은 '한글'이 충분히 우수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가지는 언어적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역시도, 그리고 중세시대를 지탱해왔던 라틴어 역시도, 그 언어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만큼만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에는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가 있는 것 만큼의 한계까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 즉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한에는 성경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 말씀의 존재론적 현현이 이 세상에 없다고 믿지만,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언어화되고 문자화된 성경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이 부분을 이해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문자들이 최소한 하나님에 의해 '인준'은 되었을지언정, 그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과 동시에 인간 저자의 목소리나 문화구조적 상식 및 선입관 등이 동시에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인간 저자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여 그 동시대인들에게 알려지게 하기 위한 목적을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인간 저자의 목소리가 개입되어 성경이 뭔가 틀린 것처럼 여겨질 때, 유기적 영감설에서는 이를 '난제' 혹은 '성서원본무오설'로 풀어내고, 칼 바르트는 '인간에 의해 성경에 포함된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공관복음서들 사이의 증언의 불일치 문제나,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자신의 딸을 하나님께 인신제사(! 인신제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의 방식'이었다!!)를 올린 입다의 문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욥기서의 구절 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유지하며 읽어낼 수 있다. 성경에 나와있다고 해서 곧 그것이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망하고 가슴아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면, '성'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인 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기 보다는 성경의 인간 저자들의 사회문화적 태도가 성경 안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히브리인들의 사회문화적인 상식적 전제들이 '영감'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경 안에 포함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에 대한 성경 일부의 부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인류를 존속시키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찬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성경에는 '성' 혹은 '섹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만이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백 번 양보해서 성경의 일부 구절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보더라도, '동성애에 대한 혐오' -- 그것이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아닌 경우에도 -- 를 두고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정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특별히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는 적그리스도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다름 아닌 성경에 의해 지지된다.


5) 전체 내러티브로서의 성경과 동성애.


앞서 물었듯이, 우리는 '동성애' 문제에 대한 성서의 태도를 파악하기 위해 '동성애' 관련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만 검토해야 하는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해당 구절만 가지고는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기가 어렵다. 한편으로는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여 '남성간의 섹스는 죄'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문자의 당시 용례를 연구하여 '해당 본문이 동성애에 대한 정죄로 볼 수 없다'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성서 전체 내러티브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겠다.

성경의 전체 내러티브를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이 전체 내러티브는 예수 그리스도에 집약되어 나타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다. 실로 성경에는 6번 정도만 등장하는 (충분히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는) '동성애'라는 글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의 사건들이 등장한다. 아니, 실로 성서 전체가 '사랑'을 구실로 존재하며, '사랑'만을 이야기한다. 구약의 성결법전이 요구하는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연합적 '사랑'의 언어로서 요구되며, 이러한 연합적 사랑의 언어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합적 '사랑'으로 연결될 뿐 아니라, 신약에 와서는 그 율법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환원'되기까지 한다(롬 13:8-10). 간음한 행위로 인해 성전 앞으로 끌려 나온 여인은 예수로 인해 위기를 모면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요 8:2-11). 사람을 영접함은 곧 초월자를 영접함이다(마18:5). 반면 예수를 믿는 작은 자 중의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만든다면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다(마18:6).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 13:34-35)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 자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라 하여 이를 혐오하는 것은 가룟 유다나 할 짓이다. 예수님 뒤통수 치는 격이고, 예수님 팔아먹는 행위이다.

동성애와 성서의 문제에 대한 실한 입문서를 저술한 다니엘 헬미니악은 "성서가 성윤리에 관한 최종 결론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헬미니악, xxvii)고 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면, "최근의 성서 연구를 살펴보면 성서적 관심의 초점인 '동성 간 성행위'는 최소한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동성애'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성서는 그 문제를 매우 다른 상황하에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더군다나, 이들 연구는 성서가 기본적으로 동성애 그 자체는 문제삼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성서는 동성애적 행동이 그 밖의 다른 도덕적 요구사항에 어긋났을 때에만 관여했던 것이다."(헬미니악, xxvii) ... "성서가 동성애를 단죄할 어떤 진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성서를 인용함으로써 동성애에 반대하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성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전혀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다른 이유로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헬미니악, xxix)

저명한 신학자인 제임스 넬슨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성서 안의 동성애 언급 본문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서의 해석권을 가져왔던 교회는 지금까지 이를 '동성애혐오감' 위에서 '이성애중심주의'에 편향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왔다고 주장한다. 즉 이러한 자의적 해석 뒤에 숨겨진 동인적 이데올로기의 정체는 바로 부지불식간에 이들 안에 자리잡은 '이성애중심주의'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사회문화의 헤게모니를 잡은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볼 때 동성애자는 무언가 '다른'(different) 존재들인데, 이 '다름'을 인정하다 보면 '이성애 = 정상'이라는 공식이 깨지게 된다는 것. 이 공식은 매우 강력한데, 그 이유는 이성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말의 수치스러운 성적 욕구마저도 '정상'의 영역으로 정당화해주며, 따라서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에 안정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식이 위태로워진다면, 자신들의 안정적인 성적 정체성 즉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정상으로 합리화해주는 그 안정성이 위협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해버린다. 여기에 '이성애자들'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자신들이 '정상'의 위치에서부터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이 공포감은 곧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감으로 변형되어 분출되며, 또한 자신들의 안정성에 위협을 가한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분출된다. 즉 '호모포비아(homophobia)'이다.

성경을 논하건대 빼먹을 수 없는 구절이 바로 예수님이 직접 인준하신 '가장 큰 계명' 구절일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인준된 가장 큰 계명은 두 가지이다. 1) 하나님 사랑, 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 그리고 이것을 가장 잘 실천하는 예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말씀하신다. 사마리아인?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물었던 유대 율법학자의 관점에서, 사마리아인은 지독하게 나빠서 상종조차 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인데, 이는 북이스라엘 왕국 성립 이후 왕국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종교적 왜곡을 단행한 이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사마리아 간의 배제적 경계선을 보란 듯이 훌쩍 뛰어넘으셔서는, '가장 큰 계명'을 가장 잘 지키는 표본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다. 그것도 유대 제사장과 레위인의 한계를 까발리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경계 넘음'에 있다.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인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예수님이 성육하여 오셨다. 삶에서 죽음으로 몰아내쳐지셨지만, 보란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신 사건이 바로 부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선민적 경계도 넘어서고, 계급간의 경계도 넘어서고, 율법-비율법의 경계도 넘어서고, 남녀간의 경계도 넘어서고, 유대-사마리아간의 종교적 경계까지 넘어서신다. 당시 사회문화적 인식에 따라 '죄인'으로 취급받던 창녀와 세리와 각종 여러 죄인들과 율법적으로 철저한 진보주의 인사들이었던 바리새인들 사이의 공고한 경계도 허무신다. 2000년의 시간적 경계도 넘어서, 바로 오늘 2014년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오셔서 말씀하신다. 본질적으로, 절대선으로서의 하나님과 죄된 우리 사이의 경계까지 넘어서 우리를 만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능력이 고작 '동성애'라는 경계(아무리 동성애를 '죄'로 여긴다 하더라도 말이지..)를 못 넘으실 거란 상상은 천박하기 짝이 없다. 그런 하나님 앞에 '이성애'와 '동성애'의 경계선을 확증해달라는 우리의 모습은 정말로 저열하기 짝이 없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타자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걷어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된 이들로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성소수자들을 배제의 논리로 거부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롬 12:2)




4. '"동성애는 죄인가?"를 궁금해하는 저의'에 대하여



이쯤에서 결론으로 마무리해도 되겠지만, 굳이 이 부분을 집어넣는다. "동성애는 죄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거꾸로 묻는다: "그것을 궁금해하는 욕망의 끝자락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마도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 여부에 관심이 생기게 된 계기는 다양하겠지만 말이다. 호기심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무성하게 배태되는 구조적 악을 끊어낼 수 없다. 우리가 동성애의 유죄/무죄 여부가 궁금하여 그 끝장을 보려는 순간, "그래서 죄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라고 묻는 순간 벌어지는 일은 다음과 같다.


1) 자기우상화


동성애 문제와 관련하여 동성애를 단순한 유죄/무죄의 틀에 가두어 놓으려는 것은 다분히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 동성애가 죄인지 아닌지를 알면, 동성애자가 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을 정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을 성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성애자들의 동성지향을 하나님이 만드셨는지 아닌지, 그것이 실수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모두 다 '알면'? 그러면 그제서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이놈, 악한 동성애자야! 기도와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 어서 그 더러운 죄를 씻으렸다!"

전술하였듯이, 우리는 아직까지 동성 지향이 선천적인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확연한 경계선의 존재의 문제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앎'이라는 유한한 '체계' 속에 미지의 영역을 꾸역꾸역 집어넣을 수는 없다. 신비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모른다' 뿐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내 경험과 지식에 의해 확정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내 머리로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내 앎의 수준을 '확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이다.

'나는 동성애에 대한 모든 면모를 알고 있다'는 것은 '나는 판단자가 될 수 있다'로, 또다시 '나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발전된다. 전술한 대로, 우리에게는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할 증거도 없고 능력도 안 되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려는 행위는, 우리 안에 우리도 모르게 자리잡은 '이성애중심주의'와 그것이 야기하는 바 '동성애혐오감'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과 성경을 도구삼아 그 이데올로기들이 '악'이라고 규정하는 바를 '죄'로 인준해주는 것 밖엔 되지 않는다. 자신이 '정상'이 아닐 수 있음에 대한 공포심이 우리를 악마로 만든다. '하나님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의 '공포심'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포심'이 시키는 바 '혐오'를 폭력적으로 분출해내는 것을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인 양 착각해버린다. 이는 다른 것 아닌, '자기우상화'이다.


2) 순수한 호기심이 가져오는 잔혹한 배타성


아. 뭐 꼭 굳이 이러한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영역에의 침범의 의도를 가지고 궁금해했던 것은 아니라는 혹자의 억울한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굳이 한 번 더 지적해보려고 한다. 그래, 필자도 당신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인해 이 질문에 접근했던 것을 정말로 믿는다. 필자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정말로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

사실상 '순수한 호기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호기심을 가진 입장에서야 당연한 인식론적 사각지대로 말미암아 정직하게 '순수'할 수는 있겠으나, 그 '순수한 호기심'에 대한 탐구는 항상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결과물을 배태해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보자면, 가만 보니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여자는 남자인 필자보다 키도 작고 힘도 약했으며 필자보다 훨씬 더 감정에 잘 휘둘리기도 하고 갖은 오해를 양산해냈던 것 같다. 이런 필자의 '경험'에 근거한 이유로, 정말로 '순수한 호기심'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리고 그 질문을 매우 공개적으로, 그리고 신의 이름을 빌어 이러한 질문을 정당화한다면? 비슷한 의미로 "흑인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아시아인은 백인보다 열등한가?" "아시아인에겐 뇌가 있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 역사상에 실존했던 인간의 죄성과 무지함의 증거이다. 궁금해하는 입장에서는 지 나름대로의 '순수성'을 주장할 수 있다 쳐도, 그것이 호기심의 '대상'이 된 이들에게는 첫째로는 '여자' 혹은 '아시아인'이라는 기준으로 전체화되어버리는 전체주의적 폭력이요, 둘째로는 이 질문은 최악의 가능성('열등하다', '사람이 아니다', '뇌가 없다' 등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식론적 폭력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가 죄인가?'라는 질문은 그 원래 목표인 '순수한 호기심의 충족'에서 결코 그쳐지지 않으며, 그 대상이 되는 이들을 폭력적으로 전체화하고 대상화한다. 그리고 그 나름의 프로세스를 통해 도출된 결론의 방향 여부에 따라 순수하게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은 그 대상자(여자, 흑인, 아시아인 등)을 만날 때에 자신의 결론의 방식대로 보고 처신하고 행동한다. 물론 도출된 결론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검증 절차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 따위가 도출된 결론의 주요 근거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동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 나름의 결론이 얼만큼 타당한 프로세스에 의해 도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에 대한 나름의 결론은 그저 그 '답 얻음'('동성애는 죄다' 혹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잔잔한 호숫가에 심심풀이 삼아 물제비를 뜨는 것일는지는 몰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에게까지 용인되지 못함에 대한 선고"로, 그리하여 스스로도 스스로를 포기함으로까지 연결되는 악마적 구조로 다가오는 일임은 분명하다.


3) 제안


차라리 불가지론을 외치고, '인간'이 되자. 자꾸 하나님인 척 하지 말고, 인간이 되자. 인간의 '인식'은 존재론적으로 한계지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당위적으로도 스스로 한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요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궁금해하던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셨던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해주신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1-22)

답해낼 수 없는 것에 하나님보다 앞서 답해내려고 하지 말고, 답해내다가 스스로 하나님 되지 말고,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를 따름'에 충실하자. 우리가 '분별해내야 할' 것은 동성애의 유죄/무죄 여부가 아니라, 아주 나이브하고 순수하고 동성애의 유죄/무죄 여부를 물으면서 일어나게 되는 우리의 기고만장함이다. 자꾸 헷갈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따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들 속의 죄를 규정해내서 그 죄를 제거하여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작업에 도가 튼 부류가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을 범할까 두려워 정밀한 인식론적 규칙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수호함으로써 스스로의 거룩성을 지키려고 했다. 자신들의 열심과 거룩이 하나님 나라를 앞당길 것으로 생각한, 진보 중의 진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이들의 행위는 예수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까였나? No! 그들은 '거룩'해지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들이 '인간'인 것을 까먹었다. 주변의 '인간'들을 까먹었다. 예수를 따름이란, 다름 아닌, '사랑'이다. 하나님을 반쪽짜리로, 단지 일부분의 하나님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5. 나름의 잠정적 결론



동성애는 죄인가? 이 문제를 물으려면 적어도,

     (ㄱ)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이성애
     (ㄴ)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

     (ㄷ)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
     (ㄹ)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

이러한 갈래들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앞서 밝혔듯이, 이러한 구분은 개별자 단위로 나뉘어지지 않는다. 이성애자인 필자는 사랑해 마지 않는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모든 순간에 (단지 성적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의 양상에서) (ㄱ)이기를 희망하지만, 그렇게 되지만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순간 순간마다 (ㄱ)과 (ㄴ) 사이를 부지런히 유동적으로 오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이성애는 (ㄱ)이요, 또 다른 누구의 이성애는 (ㄴ)이라 고정적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환원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순간과 사건에 따라 "어느 편이 주도적인가"를 물은 이후에야 논의를 위한 편리를 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갈래를 전제하여 동성애에 대해 논하자면, (ㄹ)'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는 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죄인 것은 '동성 간에 섹스 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폭력 행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죄는 (ㄴ)'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에서 욕구가 성적 욕구이든, 정복 욕구이든, 상대방에게 외적 이득을 얻어내려는 탐욕이든,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것은 죄다. 라고 필자는 본다. 그러나 상대방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것이 상대방을 도구화시키기를 그치게 하는 '사랑'에 기초한 관계라 한다면, 그것을 죄라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 문제는 동성애적 성향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얼만큼 잇닿아 있는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명확해질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불가지론'을 외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동성애/이성애'에 대한 이원론적인 접근에서 양단간의 어떤 특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는 스스로 우상이 될 위험과 그것이 야기하는 폭력과 배제의 문제를 볼 때, '판단하지 않음'의 결단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성애자'로서 만나거나 '동성애자'로서 만나기 보다는, 그러한 작위적 분류를 넘어서는 '판단유보'를 통해 '그리스도성애자'로서 다 함께 한 상에 둘러 앉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성애자들'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분리해서 한 상에 둘러앉지 못하게 하는 모든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오히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운동 아닐까.

혹자는 필자의 입장을 '동성애 옹호'의 글이라고 볼지 모르겠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좁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성애자로서, 동성애와 이성애 양쪽 모두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여, 필자가 이 글을 통해 하고자 했던 기획의 방점은 단지 '동성애 옹호'가 아니라 '성애 옹호'에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각각 '동성애 옹호자' 혹은 '이성애 옹호자'로서가 아니라, 그 경계를 허무시는 '그리스도성애 옹호자'로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람이다.

그러한 점에서 필자는 차별금지법이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반대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우리의 처참한 현 주소가 있다고 보며, 동성 결혼 합법화의 문제나 최근 서울시인권조례의 문제와 관련한 기독교계의 움직임에도 동일한 반성의 지점이 있다고 본다. 물론 반성해서 변화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나도 '선한' 모멘텀으로 귀를 닫는 일과 폭력적인 일에 열정적이셔서들..




6. 방어전



1) 동성애자는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던데?


이러한 문제 제기는 소위 '동성애로부터 구출되었다'는 이들의 '간증'에 기반한다. 예전부터, 예수님을 만나고는 동성섹스를 끊고 치유되고 구원받았다고 간증하는 분이 계셨던 것 같고, 또 얼마 전에는 SNS를 통하여 동성애의 정체를 알린다는 만화가 한참 나돌았다.

아마도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그들이 그런 환경을 경험해봤기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거란 생각이 든다. 그들의 표현처럼, 매우 문란한 동성애적 지하 세계의 존재는 팩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그러한 지하 세계가 '왜' 조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ㄹ)'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동성애'를 추구하는 이들이야, 자신들만의 지하 세계를 만들어냈으리라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ㄴ)'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이성애자'들은 그들보다 더 역한 지하 세계를 만들어냈고, 또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와 '즐거운 인생'이라는 합리화 기제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ㄴ)이건 (ㄹ)이건 그들에게 중요한 건 어쩌면 '성욕 해소'이겠다.

그러나 특히 (ㄷ)'사랑으로서의 동성애'의 경우에는 이게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동성애는 일반 사회 안에서도 매우 금기시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나름 사회에서 소외될 법한 이들을 품어오는 역할을 하는 교회에서마저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되어 왔다. 부모와 형제와 친구들은 고사하고 '하나님'에게마저 용납되지 못하는 이들.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게 된다면, 그들은 어디에 기댈 수 있겠는가? 모든 인간 존재가 그런 것처럼 자신을 이해해주는 누군가 혹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회를 찾아 나서겠지.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의지하게 된 것이 (ㄷ)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일 (ㄹ)이라면? "원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라는 무시무시한, 그러나 그 외에는 다른 용납의 기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정말로 무서운 구조적 악이다.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을 발견한 이들이 (ㄷ)과 (ㄹ)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이전에 이미 구조적으로 (ㄹ)로 몰아세우고 있다면? 동성애에 대한 혐오적 발언("성경은 동성애를 죄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류의..)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나 특히 교회와 예배 시간에 번듯하게 표명되는 것은, 이성애자들에게 "결혼과 섹스는 죄악이니,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절대 결혼과 섹스를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폭력과 하등 다르지 않다. 물론, 성서는 결혼과 섹스와 동성애에 대해 명확하게 정죄하고 있지는 않다.

정말 문제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깨달은 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지속적이고 건강한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만한 인프라가 그들에게 제공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인프라를 제공하려는 생각 없이 무턱대고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회와 교회가 바로 그들을 그 역한 '지하 세계'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성찰해보아야 한다.

또한 사실상, 파트너와의 지속적인 일대일의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성애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교회와 사회의 편견 때문에 그들이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그들은 '존재한다'. 모든 이성애자가 매번 파트너를 돌려가며 변태섹스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동성애자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과 식성을 맞춰가며 후장섹스를 해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라고 전제해버리는 어리석음만큼이나, 동성애자를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기를 속이고 상대를 도구화하는' 이들로 치부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지 섹스에 국한되지 않은, 섹스가 없더라도 충분히 사랑을 논할 수 있는 이성애자들처럼 동성애자들도 동일한 '선택'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그러한 인간을 '극한'과 '역한 지하 세계'로 몰아내는 악마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2) 동성애는 죄지만 동성애자는 품어야 하므로 치유의 대상이다. 혹은 동성애는 정신적 질병이므로 치유의 대상이다. 신앙으로 동성 지향을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미 현대 정신의학의 입장은 전술한 바 있음. 간단히 반복하자면, 가장 최신인 DSM-V에 의하면 동성애는 정신 질환이 아님.

치유라는 개념 자체는 계급규정적, 일방적, 폭력적 개념. '너는 병들었지만, 나는 병들지 않았다', '너는 병들었지만, 나는 정상이다',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라는 판단이 이미 들어가 있음. 결국 (그것이 강간의 경우라 하더라도) 모든 이성애를 긍정시켜버리고 (그것이 사랑에 연유한 일대일의 지속적 관계라 하더라도) 모든 동성애를 폭압적으로 제거해버리려는 전체주의적 폭력성이 담겨 있음.

'질병'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 동성애를 '정신적 질병'의 상태로 진단한다면 그것은 이성애를 '정신적 정상'의 상태로 진단한다는 전제가 수반된다. 문제는, 모든 이성애가 '정신적 정상'이냐 하는 것. 수 많은 강간, 원나잇 잠자리, 스토킹.. 이것이 모두 '정상'이라는 전제 하에야 동성애를 '질병'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게 옳은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를 도구화시키는 행위'를 서슴없이 행동에 옮기는 것이 '정신적 질병'의 상태가 아닌지? 하긴, 멀쩡한 사람을 앞에 놓고 네 섹스 행위가 어떻네 저떻네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질병적' 상태라는 생각.

신앙으로 동성 지향을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주장은 아마도, (ㄹ)동성애자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신앙의 힘으로 섹스중독에서 벗어나게 된 경우를 주로 근거로 드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성애자가 항문 성교에서 오는 쾌감이나 남성을 여성처럼 '사용'하여 얻게 되는 정복욕에서부터 오는 쾌감으로 인해 남성에게 삽입하기를 즐겨하거나, 혹은 전립선 마사지 등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에는, 신앙에 따른 어느 정도의 금욕적 효과 등에 의해 섹스중독이 치료되는 경우 다시 이성애자로 '회복' 혹은 '치유' 혹은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일어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모든 동성애적 성향이 죄, 그러니까 '신앙 없음'의 문제와 연관될까? 반례를 딱 한 가지만 들어주지. 깊은 신앙적 묵상과 글로 우리를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만들어준 고마운 인물들 중 헨리 나우웬(Henry Nouwen)도 동성애자다. 아마도 나우웬은 신앙이 부족해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칠 수 없었나보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ㄷ)동성애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아 구원에 이르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거나.

아. 물론 동성애자라고 해서 이성애자와 다르게 자기 꼴리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성애자들에게 요구되는 만큼의 윤리가 동성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들 중에서 성적으로 문란한 이들에게는 '변화'가 요구된다. 이에 대해 헬미니악은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성서가 동성 성교 행위를 무조건 단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성애에 비해) 동성애에 관한 단죄의 언급이 훨씬 적다는 것이 동성애자들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성서에 의지해 인도와 감화를 받는 레즈비언들과 게이들이라면 틀림없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도덕적 가르침들 즉, 열심히 기도하라, 하느님을 경외하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라, 충실하고 친절을 베풀라,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라, 정직하게 살라, 그리고 정의로워지라는 가르침에 의무감을 느낄 것이다. 이에 덧붙이자면 조화와 평화를 위해 힘 쓰고 진리의 편에 서며, 모든 선한 일에 힘쓰고 자신이 아는 모든 악한 일을 피하는 것이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성서대로 살아가려면 게이들과 레즈비언들은 엄격한 도덕적 요구들을 따라야 한다. 그 요구들은 당연히 섹스와 친밀한 관계에도 적용된다." (헬미니악, 201)





3) 이런 얘기하면 동성애자가 많아지는 것 아니냐, 유행처럼 멋모르고 순식간에 퍼지는 것 아니냐, 너는 니 딸이 동성애자가 되면 좋겠냐. 라는 주장에 대해.


순수한 의미에서 동성 지향을 가진 이들이 '동성애는 죄다'라는 전체주의적인 정죄를 받아 생을 포기하거나 혹은 (ㄹ)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면, 수면 아래에서 자행되는 자기파괴적 행위들을 그냥 놔두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해보아야 함. 동성애자가 많아진다기 보다는, 사회적이고 (특히) 종교적인 억압적 잣대들로 인해 지금껏 동성적 성향을 숨겨왔던 이들이 그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내 사랑하는 딸이 '자신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자가 되려 한다면, 어떻게든 뜯어말릴 생각. 마찬가지로, 동일한 의미의 이성애자가 되려 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뜯어말릴 생각. 그러나 사랑하는 내 딸이 충분하고 reliable할 만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동성 지향인 것을 확인한다면, 그래서 이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건강한 관계를 지속해내고자 한다면, 나는 그에 대해 저속한 언어로 우리 딸을 배제해내려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해 딸과 함께 끝까지 저항할 것임.






4) 동성섹스로 에이즈가 많이 퍼지지 않나? 오늘날의 가장 무서운 병인 에이즈는 동성애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이지 않은가? 라는 주장에 대해.


좋은 자료가 있길래 그대로 인용한다.

동성애자 가운데서 에이즈와 후천성면역결핍증의 사례가 많다는 연구결과가 없지 않았으나 그 반대의 연구 결과도 제시되었으므로 동성애가 에이즈나 후천성면역결핍증 유발과 확산에 유의미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최근의 주장이다.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는 “HIV/AIDS는 동성 간 성 접촉으로 인한 감염가능성(39.3%)보다 이성간 성 접촉 비율이(59.7%) 월등히 높다”며 한국에이즈정보센터 1985~2009년 통계를 제시하였다. 이성간의 에이즈 감염이 “동성간 접촉을 통한 감염보다 700배나 높다”는 <동성애허용법안반대국민연합>측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이미 25년 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에이즈는 게이들의 병이라고 알고 있다. 게이나 레즈비언의 절대다수가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고, 에이즈에 걸린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게이나 레즈비언이 아니다. 미신일 뿐이다.”고 하였다. (허호익, "동성애에 관한 핵심 쟁점 - 범죄인가, 질병인가, 소수의 성지향인가?," 248-249.)

그 외에 참고해볼 만한 기사(http://ppss.kr/archives/7944)와, 통계자료가 포함된 블로그글(http://jinmedi.tistory.com/19)을 참고할 것.





참고문헌



다니엘 헬미니악,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James Nelson, Body Theology.
James Nelson, Embodiment.
Lisa Isherwood and Elizabeth Stuart, "Queering the Body," in Introducing Body Theology.
Sherwin Baily, Homosexuality and the Western Christian Tradition.
Victor Paul Furnish, "Homosexuailty," in The Moral Teaching of Paul.
John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Robin Scroggs, Homosexuality in the New Testament.
L. William Countryman, Dirt, Greed and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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