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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설교] 행 1:1-11 "증인으로서의 동행"





부천동광교회 DK TEENS 고등부 동계수련회 집회1 설교
2012년1월 30일
“증인으로서의 동행”
김성은


사도행전 1:1-11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 우리가 묵상한 본문은, 여러분들께서 읽으신 대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의 일들을 종합하여 기록하고 있죠. 뭐, 성경에 쓰여있는 한국말 표현이 좀 그렇게 막 쉽게 이해되는 편은 아니죠? 3절에 보면,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라는 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걸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라는 뜻이겠죠. 그 다음에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나셨’대요. 이건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까지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라고 볼 수 있겠구요.

그 다음에는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옵니다. “사십일 동안 그들(제자들)에게 (자기가 부활하신 것을)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뭐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구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죠? 자,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30세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3년 동안 사역하시다가, 33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다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대요. 그렇다면 이 마지막 40일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시기였을까요? 그 십자가에서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열심히 전파하셨지요. 근데 사람들은 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후에는, ‘거봐, 내가 다시 살았잖아, 나는 진짜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 세상의 구세주이고, 너의 구원자야’라고 하는 말에 힘이 제대로 실리는 거죠. 그런 중요하고도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때가 겨우 40일밖에 남지 않았대요.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들을 이 때 하셨는지를 우리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겠죠. 마지막인데,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는, 이렇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되어서야 가능한건데, 이게 도대체 언제 올지 모르는거죠. 그러니, 이 40일 동안에 예수님은 정말로 엄청나게 중요하고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하셨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모든 이야기를 한 마디로 축약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하죠.

하나님 나라의 일. 이건 그냥 무슨 ‘일’이 있고, ‘숙제’를 하고 뭐 그런 일, the work of kingdom of God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이런 모습일거야, 저런 모습일거야.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어. 근데 요런 건 찾아볼 수 없어.” 뭐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토요기도회에 꾸준히 나오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비전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제 비전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단순한 한국 그리고 바다 건너면 일본, 태평양 건너면 미국, 뭐 이런 식의 ‘장소적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통치의 의미’입니다. 뭐,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한국에 있어도 한국 사람이고, 일본에 가 있어도 한국 사람이고, 미국에 가 있어도 한국 사람인거죠. 하나님 나라라는 건 우리가 세상 속에 살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라니까 ‘왕’이 있겠죠)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당연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겠죠. 근데 꼭 죽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어떤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제 비전이고, 또한 이걸 유통하는 것이 제 비전이자 사명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꿈꿀 수 있게 하는 거죠. (직업이 비전이 아님)

암튼,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들을, 부활하신 이후 40일간 이야기하셨다는 거죠. 얘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되면, 너희 가운데 이런 이런 일들이 일어날거야~! 너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면, 너희는 저런 저런 일들을 경험하게 될거야~! 이런 이야기들이 성경 이곳 저곳에 무더기로 쓰여있지요.

그렇게 40일이 지나고 난 뒤,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사도들을 한데 불러모으고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분부하시는 장면이 4절부터 나오네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이거는 뭔가 되게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데요, 요 4절과 9-11절 말씀은 나중에 폐회예배때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겁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뭘까요? ‘성령’입니다잉~. 어제부터 아주 기냥 징하게 ‘기다리라’죠? 5절,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대요. 그러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거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네요. 실제로, 이 성령 세례를 받는 장면이 바로 다음인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죠.

세례의 의미가 뭘까요? 세례 받으신 분? 안 받으신 분? 세례를 받을 때 물을 한 줌 떠다가 머리 위에 붓잖아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뭐 이러잖아요. 이 뜻이 뭔지 아세요? 물이 머리 위에 올라가 있다 함은, 우리가 물에 빠졌다는 것을 상징하구요, 이건 ‘죽음’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옛사람인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거듭 태어난다, 즉 거듭남의 의례적 의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까 5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이런 의미에서 물로 세례를 받았지? 이제 곧 너희는 성령에 의해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성령에 의해 우리의 새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게 됨을 경험하게 될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랬는데, 6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궁금한 게 생겨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이 질문이 얼만큼 개념없는 질문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백성들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네 민족 이외에는 다 나쁜 놈들이고 더러운 놈들이고 구원도 못받는 ‘이방인’이라고 보았었죠. (그러면 우리도 구원 못받는 겁니다잉) 근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은 줄로 알았는데, 이건 왠걸,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더니, 급기야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추잡한 이방인들에 의해 남쪽도 북쪽도 모두 바벨론과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바벨론과 앗수르는 이들의 정체성을 뿌리뽑기 위해 ‘이민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이게 뭐냐면, 바벨론에 사는 바벨론 시민을 이스라엘에 가서 살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시켜서, 사람들이 섞이게 하는 거죠. 여기가 이스라엘인지 바벨론인지 모르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자기 고향이 없어지는 거죠. 이스라엘 나라는 완전히 망한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당대의 강국인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찢겨진 자기네 민족에 대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형태로 독립 운동을 많이 벌여왔더랬죠.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독립을 하려고 시도해보았습니다. 이들이 성경에 ‘열심당’이죠. 분봉왕 헤롯과 손잡은 그룹은 ‘헤롯당’이었구요. 투철하게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게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귀족들로 구성된 그룹은 ‘사두개파’였구요.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하여 회복되는 그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었지요. 우리 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의 날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처럼요.

그런 해방의 날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들이 먼저 기다렸던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메시야’라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게 된 이후에, 여러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메시야’가 나타나서 외국의 압제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거고, 찢겨진 우리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이다, 라는 예언을 했었죠. 사람들은 그 예언을 믿고, ‘메시야가 오면 우리가 회복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은 그 메시야가 정치적인 ‘왕’으로 나타나게 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태어나는 배경도 어마어마할 거라고 생각했고, 정치와 외교와 군대 장악 능력이 뛰어난 최고의 장수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힘이 있어야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테니까요. 근데, 우리가 믿는 ‘메시야’인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셨죠?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완전 시골 촌구석이죠. 겨우 ‘목수’ 아들이구요.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안 믿고 까불지 마라고 하는 거죠. 근데 예수님이 계속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기니까 사람들이 짜증나서 죽이려고 한 거였습니다잉.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에 대해묻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습니다. 뭐,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제자들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그토록 말씀해오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제자들은 ‘사람의 정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 나라의 독립’에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승천하시려고 하는 바로 이 마지막 순간에 이런 걸 물어보는 거죠. 3년동안 예수님과 같이 살면서 예수님에게 배운 제자들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로 들은 거죠. 개념이 참 없는 거죠.

어쨋든 제자들은 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에 대해서, 그 ‘시간’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시간적 개념’이죠. 그게 언제입니까? 지금입니까? 지금 안 하시면 언제 하시려구요?뭐 이런거죠. 여기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걸작입니다. 7절, ‘너네가 지금 시간을 물어보는데, 때와 시기, 즉 시간은 너희가 알 바가 아니야. 그건 성부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 있는 거야. 그게 언젠지는 성부 하나님만 아시는 거야. 그런데,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령이 임하시는 때가 있을 건데, 바로 그 때에 우리는 권능을 받게 될거고 증인이 되게 될거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말했습니다. 그걸 다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로 받아치신 거죠.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 즉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증인이 되게 될거야’라는 거죠.‘몇월 몇일 몇시’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는 그 모든 시간’으로 대답하심으로써, 그 시간을 확장해 놓으시죠.

우리 한 번 8절을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뭐, 이 정도는 다 외우고 계시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니라”. 잘 정리해보면, 3단계가 이 속에 있죠? 보이시나요? 1)성령이 임하시면 2)권능을 받고 3)증인이 되리라.

자, 이 순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잉. 우리가 증인 노릇을 한다고 해서 진정한 증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권능을 받은 척 한다고 해서 우리가 권능을 가진 자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신다는 조건 하에서만 우리는 권능을 받게 되는 것이고,우리는 그 권능을 가지고 이 모든 땅의 지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어제 이야기했었죠?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임재하신 이 성령 안에서 성령님을 누리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권능을 받게 될 겁니다. 권능이라는 것은 권한과 능력이죠. 우리 앞에서는 산적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시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시는 분들 계시나요? 그런 분들을 제가 좀 아는데, 그런 분들은 주로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살고 계시죠?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죠, 그냥 마냥 좋은 분들이 계십니다~ 없진 않아요~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는, 문제 없는 인생을 사는 분은 없습니다. ‘적을’ 수는 있겠지만,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들은 그 크기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다양하죠. 어떤 문제들은 쉽게 넘길 수 있는 작은 문제도 있습니다. 또 어떤 문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대단히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작은 문제인데도 쉽게 넘기지 못할 때가 있고, 반대로 정말 큰 문제인데 너무 쉽게 넘길 때가 있지요. 무슨 차이일까요? 어떤 문제가 정말로 나에게 문제가 되고, 그것을 쉽게 넘기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그 문제보다 큰 은혜가 우리 가운데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 충만히 젖어 있으면, 어떤 문제든지 쉽게 넘길 수 있어집니다. (그러한 점에서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력’이라는 이야기를 어제 나눴었지요) 그러나 우리 가운데 은혜가 없으면, 아무리 작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감당해내지 못하고 밖으로 폭발시켜버리게 되고, 이걸 열심히 참다보면 결국 우리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듭니다.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크고 작은 문제들을 더이상 나에게 문제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권한과 능력입니다. 이 권능은‘예수 그리스도’로서의 권한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능력으로, 이 권능에 의해 우리는 우리 앞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권능을 가진 사람이 상태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는 성경 본문이 있는데요, 고린도후서 4장 7-9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죠.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보배는 ‘주의 영’, 즉 성령을 말합니다. 질그릇은 우리죠. 그러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 하는 겁니다. 계속 읽어봅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아멘이십니까? 우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안에 이 보배를 가지게 되면, 세상이 사방에서 우리를 우겨싼다고 해도, 우리는 싸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우겨싸고 싶어해도 우겨싸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아, 감동이지 않으신가요?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권능은, 우리로 ‘증인’되게 만듭니다. ‘증인’이 뭔지 아시나요? 아시죠? 법정에서, 얘가 지난 여름에 한 짓을 알고 있는 사람이죠? 뭔가 본 게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사람이 바로 증인입니다.‘보지 못한’ 것을 ‘봤다’고 말하면, 그건 증인이 아니라, 사기꾼이죠.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불의 혀 같이 임하는 성령 세례의 체험을 한 이후에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요, 거기에 ‘증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인데요, 함께 읽어볼까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십자가에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본’ 것에 대해 증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본 적 있으세요?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은 눈으로 본 적 있으시냐구요. 그림으로 말고, 진짜로 본 적 있습니까? 뭐, 사실, 그걸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지금 누가 살아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 어떤 인간도 그 사실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그게 이상한 거죠.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게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그 분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될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생깁니다. 눈으로 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의 눈으로 보는 건 가능합니다. 영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거죠. 그분을 만나지 않고는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전반절만 다시 보도록 하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데, 그 사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신다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그리스께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겁니다. 그가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과의 동행이 없이는, 우리는 ‘증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뭔가 본 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증인이 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증거할 것도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게 단지 지리적인 공간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절대 아니죠! 오늘 아침에 비전특강에서 바늘 끝에 있는 대장균 사진을 보셨죠? (먹음직스러우셨나요?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아서..) 이거 뭐 너무 작아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연구함에도, 너무 커서 눈에 보이지 않는, 뭐, 지구 전체, 우주, 뭐 그런 것을 다루는 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겁니다. 대장균 DNA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아, 저렇게 작은 것에도 하나님의 설계와 계획하심이 들어있구나!

이게 바로 증인의 역할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만난 것을 증언하는 것. 내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숨쉬는 삶. 이게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죠. 이러한 삶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V/R,

Kim, Sung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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