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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설교] 창 22:1-19 "여호와가 보이는 곳"




부천동광교회 DK TEENS 고등부 동계수련회 저녁집회2 설교
2012년1월 31일
“여호와가 보이는 곳”
김성은


창세기 22:1-19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었던, 좀 뭔가 대단하고 감동적이긴 한데, 또 생각해보면 의아스러우면서도 괴기스러운,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일학교에서부터 배울 수 있는, 많이 알려진 친근하고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읽어보아서 아시겠지만,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불러서 뭔가를 시키십니다. 뭔가요? 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거죠. 이건 뭐 어처구니가 없어도 많이 없는 요구를 하나님이 하십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번제를 드리는 방법이 나옵니다. 이 방법에 따라 제물을 번제로 바치려면, 제물이 되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새 등등의 짐승을 잡아 죽여서,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토막을 낸다는 거죠)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웁니다. 내장과 정강이는 물로 씻고 또 불에 태우는 거죠.

대충 이것이 번제를 드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요구는, 이러 저러한 짐승이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인간인, 아브라함의 단 하나뿐인 아들을 이렇게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우선 죽이고 그 피를 사방에 뿌리고(으윽)살가죽을 쫙 벗기고.. 벌써부터 괴기스럽죠? 이건 뭐 제정신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겁니다.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해도 괴기스러운 판국에, 정말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건 쫌 ‘많이’ 그렇지 않나요? 하나님은 아브라함더러 이런 정신 나간 일을 하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거죠.

근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한번 볼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콜링하시면서 주신 축복의 말씀이죠. 함께 찾아서 같이 읽어보는데요, 이 중에 읽으면서 ‘어? 이건 뭔가요?’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읽어봅시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어?’ 하는 부분을 혹시 발견하셨나요? 2절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축복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보면 아브라함에게 단 하나 있는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 민족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냥 쪼끄만한 민족 말고, ‘큰 민족’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자식들을 낳아야 할까요? 큰 민족을 이루려면 우선 자식이 좀 많아야 가능성이 좀 있겠는데, 아브라함은 아들이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의료 기술도 별로 좋지 않아서아기들이 병들어 그냥 죽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아시죠? 그러니 이건 뭐 단 한 명 잘 키워서 ‘큰 민족’을 이루는 건 사실 당시로서는 가능성 있어보이지는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있는 아들까지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뭔가요~

성경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때에” 라는 기록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이름을 바꿔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뜻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이죠. 근데 이걸 듣고 사라가 빵 터집니다. 왜요? 아직 자기는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거든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첩의 자식인 ‘이스마엘’ 말고는 딴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99세 때까지도 자식을 낳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18장 11절에 보면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느니라”는 구절도 보입니다. 뭐, 임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의학적으로는 ‘없는’ 겁니다. 임신을 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는 겁니다잉. 안되는 거예요잉.요새 결혼들을 늦게 해서 그렇지, 자매들 30세 쫌 넘어서 출산해도‘노산’이라고 합디다. 근데 이 때 사라는 ‘89세’였습니다. 노산도 보통 노산이 아닙니다. 낳아도 그 아기가 건강할지 확신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뭐, 옛날엔 오래 살았잖아, 한 900살 정도.’ 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건 노아 이전의 얘기입니다. 창세기 23장에 의하면, 사라는 127세에 수명이 다해서 죽었습니다. 수명의 4분의 3을 산 이후에 아이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라는 건강하게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때, 사라가 90세 때의 일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2012년인 오늘까지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 아들을 얼마나 즐거워하고 기뻐했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뭐, 잘 모르시겠죠. 처녀 총각들이 뭘 알겠습니까마는. 애를 낳아봤어야 알지..ㅋ 암튼, 이렇게도! 극적이고 감사하게 얻게 된 아들 ‘이삭’을,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잡아 죽여서 나에게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잔인한’요구를 하고 계신거죠.

하나님의 이러한 잔인하고 야비한 요구에, 어쨌든, 성경의 표현에 비추어 보건대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저 같았으면 애걸복걸 했을텐데요. ‘아니,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죽입니까? 얘 대신 제가 죽겠습니다’ 하면서요. (뭐 여러분들이 이 마음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마는. 푸훗) 암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릅니다. 산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불을 피울 나무를 벌여 놓은 다음, 외동 아들 이삭을 결박해서 그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후의 아브라함의 행동이 10절에 나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처음에 나오는‘잡고’랑 ‘뒤에 나오는 ‘잡으려 하는’ 것은 뭔가 다른 ‘잡는’ 거죠. 어감이 확 달라지죠. 근데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얘기죠. 그리고, 이삭 대신 제물로 바칠 숫양을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사람들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 즉 ‘여호와 이레’라고 부른다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정신 나간) 생각으로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인 이삭을 바치려고 한 것이었을까요? 지금 우리가 결말을 알고 있는 옛날 얘기를 읽듯이 그냥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고 그냥 죽이려는 ‘척’을 한 것일까요? ‘에이, 설마’, ‘하나님, 멈추라고 말해주시려고 그러시는 거죠?’ 하는 마음으로 그런 것이었을까요? 그런 건 아닐 겁니다.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이 가능한 게 아니죠. 하나님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면, 진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진짜로 죽일 생각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읽어서 이미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고 칼을 뽑아서 찌르려는 순간까지만 보면, 하나님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기 직전까지만 떼어놓고 보면, 사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미 죽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진짜 죽이려고 했던 그 아들, 이삭.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단순한 아들, 그 이상이었습니다. ‘아들’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하나님이 축복을 부어주시는 ‘약속’의 증거였습니다. 아까 전에 같이 봤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첫 시작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서 기적같이 선물로 받은 증거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고 기억하고 확신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였습니다.

당시에는 보험회사 같은 게 없었죠. 국가라는 게 딱히 있지도 않았구요. 그러니 요즘 같은 ‘국민연금’이나 ‘노후관리’ 같은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늙고 기력이 쇠해져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아들’이 바로 ‘국민연금’이나 ‘노후관리’의 역할을 했고, 늙은 아버지의 ‘비전’의 역할을 했습니다. 즉, 늙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건강한 아들은 곧 ‘보장된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100세가 되어서야 한 아들을 얻게 된 아브라함에게, 그‘아들’ 한 명은, 아브라함의 전부, 곧 그의 ‘비전’이자, ‘미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끝’이다, 라는 것과 동시에, ‘나의 미래’는 이제 ‘끝’이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불행한 미래로 자기 자신을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단순히 병들어 죽을지도 모르는 아들을 하나 죽이고 다시 낳으려고 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잔인한’ 요구에 자신의 전부, 곧 그의 ‘보장된 미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보장된 불행을 선택하는 결심.

그런데, 우리가 읽은 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결심’을 보고는, 아브라함이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서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말씀하셨던 축복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선포하십니다. 15절-18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아까 읽어본 12장의 말씀이랑 동일하게, 여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두 가지 단계가 보입니다. 첫 번째는 17절에 “내가 ‘너와 네 씨에게’ 큰 복을”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민민이’ 복을 받는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세상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3장 16절, 다 외우시죠?“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여 ‘생명’이라는 복을 얻게 하시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이 복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복된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며, 또한 그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통해 세상이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말이 자꾸 길어져서,, 중간 정리를 좀 해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잔인한’ 요구를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걸던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바친 결과는, 결국 아들 이삭은 살았고, 아브라함에게는, 이러한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확실한 미래’가 주어졌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것이 ‘자신의 미래’였다면, 그에게는 이제 ‘확실한 하나님의 미래’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미래가 자신만의 미래가 아닌, 온 세상이 걸려있는 미래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미래를 아브라함에게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여호와 이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실 /예흐바 이레/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원래 정확한 번역은 ‘준비’라기 보다는, “여호와가 보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원래 히브리어 의미를 좀 더 잘 살려보면“아브라함은 그 곳 이름을 ‘여호와가 보신다’라고 불렀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 곳 이름을 ‘여호와가 보이는 산’이라고 했다”는 것이 히브리어 원어의 보다 정확한 직역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그 곳 이름을 하나님이 ‘보신다’ 혹은 하나님이 ‘보이는’산이라는 등의 ‘보다’라는 /이레/ 동사를 사용했을까요? 그냥 우리가 한글 성경에 나온 대로 ‘준비’라는 단어를 접하다보면, 원래 의미를 잊어버린 채, 그냥 하나님이 ‘숫양’을 준비하셔서 준비했다고 그랬나보다 라고 오역할 수 있습니다. 왜 ‘보다’라는 /이레/ 동사를 사용했을까요? 도대체 뭘 보았길래 모리아산 이름을 ‘여호와가 보이는 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잡고’ 그 사랑스러운 외동 아들을 ‘잡으려’ 할 바로 그 때에 아브라함의 ‘미래’는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하나님께서는, 망한 것 같아 보이는 아브라함의 미래를 하나님 자신의 미래로 지탱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미래는 무너진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미래는 그것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 미래를 실제로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거죠. 무너진 것 같은 미래, 그러나 그것을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 무너진 것 같은 ‘나’, 그러나 여전히 ‘나’를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때에도 동행하고 계신 하나님. 그리고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보는 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라는 거죠. 이러한 하나님이 보이는 세상, 즉 세상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목도하는 세상.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이는 곳’, 즉 ‘여호와 이레’이며, 또한 이것을 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 편만히 보이는! 이거 참 근사하지 않나요?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봅시다. 깊이 좀 생각해보죠. 생각해보면 좀 우울해지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완벽’하신 분이신데, 분명히 우리의 삶은 ‘완벽’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사실 ‘전능자’의 모든 능력이 실현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데, 그 사랑, 때로는 전혀, 때로는 겉으로만 느껴질 때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신데, 우리의 미래는 ‘뚜렷’이라는 단어랑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그냥 그저 막연하고 어둡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솔직히 많이 있습니다. 수련회 때 자꾸 ‘동행’, ‘동행’ 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진짜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다면, 우리 기억 속에 있는 그토록 비참했던 그 때와 그 상황이 있었어서는 안되는 거였습니다.‘진리’라는 것, 허공에 떠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진리와 하나님을 증명해보이려고 합니다. 근데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증명될만한 존재였다면, 그게 과연 무한하신 하나님이실지는 모르겠죠. 전 오히려 증명될 수 없는, 과학적 근거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더 진짜 하나님의 모습과 가까울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운 우리의 미래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바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 아니, 나에게 – 하나님 당신의 미래를 거실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어두운 미래와 불완전한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과 미래를 ‘여전히’, ‘성실하게’, ‘끊임없이’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될 겁니다. 우리의 삶과 미래를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과 고단함이 소리치는 삶의 현상 가운데,‘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칠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그런 깡다구가 여러분들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게 되는 나의 미래. 바로 그것이 ‘여호와 이레’이자 ‘하나님 나라의 임함’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를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게 되는 ‘세상’의 미래.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여기서 잠깐, 지금까지의 이 이야기를 그냥 단순히 give and take,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도 뭔가를 드려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뭔가를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건 우리 안의 하나님의 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전혀 주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애걸복걸하면서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조건을 우리가 맞춰오면, 그 때에야 ‘옛다’ 하면서, 여러분들 주기 아까운 축복을 툭 던져주고, 뭐 그러신 분이 아닙니다. 그냥 막 주고 싶으신데, 우리가 받기에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죠. 이게 이해가 안되시는 분들은, 어느 순간엔가 확 이해가 되실 때가 올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give and take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에만이 하나님의 일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넘어서, 그 사이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여하고 경험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는다?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free rider입니다. 우리는 종말 이후에 올, 완성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맛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은데, 우리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가 왕왕 있고, 그래서 뼈빠지게 열심히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는데 주어지는 건 없고 그냥 내 일은 그저 내가 알아서 해야 할 뿐이라는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종말 이전인 현재의 일들은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옛 것의 지는 것과 새 것의 일어남이 당연함을 알 수 있습니다.이 세상에서는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지탱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에서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테제에 대항하거나 안티테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간과하는 것을 대변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좌파냐 우파냐를 떠나,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모든 인간이 대립을 넘어 하나님의 축복의 백성이 됨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점에서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무엇에 대한 동의자나 반대자로서 존재하기 보다, ‘예언자’로서, ‘완성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대변자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세상에 대해 예언자적인 선포자가 되기는커녕, 그 안에 속해서 적응하기도 어려워하죠. 왜 이런 문제가 있냐면, 우리의 시각이 현재 세계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이것을 꿰뚫는, ‘완성’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처절히 적응하려 하는 이 세상이 ‘미완성’이라는 것을 인지하면, 속에서 열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하나님이 동행하신대매? 근데 왜 난 그걸 못느껴? 도대체 ‘진리’는 어디에 있지? 도대체 ‘완성’은 어디에 있지?” 이럴 때, 그 화를 삭히려고만 하지 말고, 그냥 체념하려고만 하지 말고, 무엇이 미완성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곳에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고, 미완성된 부분의 완성을 지향해 나가는삶. 너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함을 선포하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삶입니다. 참 근사하지 않나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그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한 테스트와 동일한 요구를 하십니다. “너의 미래를 내게 바칠 수 있겠니?”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황당하고도 때로는 잔인한 요구를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너의 미래를 내게 바쳐라! 그리하면 나의 미래를 너에게 선물로 주겠다. 그리고 우리의 이 일을 통하여 세상의 미래를 열어가겠다!”하나님의 진심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나의 미래를 받으라. 그래야 너희가 산다”는, 엄중하면서도 동시에 애끓는, ‘삶’에의 요청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DK Teens 고딩 여러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를 어떻게 열어가시겠습니까? 그냥 좁은 가슴 부여 잡고 좁은 생각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미래, 우리의 미래를 넘어, 온 세상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미래를 우리의 가슴에 새겨서 그 비전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원대한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보입니다. 여러분, 가진 게 뭐가 있습니까? 어쩌면 여러분들은 스스로 가진 게 많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여러분, 가진 거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많기를 합니까, 능력이 되기나 합니까? 그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건 여러분들의 ‘미래’ 뿐입니다. 빨리 빨리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가진 게 없을 때 빨리 바치는 게 정신 건강상 훨씬 좋습니다.

우리의삶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여호와 이레의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의 시작입니다.우리의 보장된 미래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확실한 미래가 우리의 미래가 되는 삶. 그리하여 주어진 우리의 새로운 미래에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미래를 걸고 계시는 삶.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여호와가 보이는 삶이자,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입니다.


V/R,

Kim, Sung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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