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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설교] 창 1:26-28 "세상과의 관계: 다스림"




부천동광교회 DK Teens Worship 설교
2012년2월 5일
“세상과의 관계: 다스림”
김성은

창세기 1장 26-28절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등부 수련회 잘 다녀왔습니다. 은혜 많이 누리고 돌아왔죠? 고등부 지체들은 그 주신 은혜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그 은혜 누림이 우리의 DK Teens 예배와 토요기도회를 통해 계속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관계’라는 1월 테마 주제의 마지막인 ‘세상과의 관계: 다스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2월달인데 왜 1월 테마 주제를 가지고 하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구정예배를 어른들과 함께 ‘온가족 예배’로 드렸었죠. 그래서 오늘까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 주부터는 ‘관계’에서 첫 번째로 다루어졌던 ‘예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기대되시지요들? 다 알고 있습니다잉~

오늘은 관계 중에서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세상과의 관계. 여러분은 세상과 어떤 관계에 있으세요? 그냥 ‘세상’이라고 하면 좀 애매하니, 여러분은 ‘공부’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여러분은 ‘성적’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우리가 성적을 좌지우지 하나요, 아니면 성적이 우리를 좌지우지하나요? ‘돈’과 관련해서는, 여러분은 ‘돈’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우리의 ‘사회’라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회’가 여러분들의 교육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할 만큼, 사실상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겁니다. 오늘날의 ‘사회’라는, 이 애매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고 정의내리는가에 따라, 그 사회의 구성원에 적합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거죠. 뭐, 이런 식으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세상’과 관계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세상과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창조’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지요. ‘교회’를 창조하신 게 아니고,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셨거든요. 그러한 세상과 만물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관계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창조 목적을 기록해놓고 계십니다. 그게 뭘까요? 네, ‘다스림’입니다.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 -(여기에서 ‘우리’라 함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말해요)-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 다음에 목적이 나옵니다. 왜 사람을 만드냐면,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왜 사람을 만드셨다구요? ‘다스리게’ 하려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답니다. ‘남자와 여자’. 가끔 보면 이런 경우가 있어요. 교회에서 형제들과 자매들이 서로 너무너무 친해서 ‘이성’으로 안 보이고, 그냥 동성 같고 그런 경우가 있어요.

뭐, 친한 게 뭐가 문제겠냐 싶긴 한데,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이 화성에서 온 남자의 세계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세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이해불가의 강’이 있습니다. 이건 사실, 둔한 형제들은 잘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 같고, 자매들은 그래도 좀 잘 알고 있을거라 생각되는데요. 근데 너무 친해지다보니 이 건널 수 없는 강을 무시하고, 그냥 너와 나를 ‘친구’라는 단어로, 형제 자매 구분 없이 친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특히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근데 문제는 이런 게 정말 진짜로 친한 증거인 것 같지만, 사실 종종 오해와 갈등과 싸움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아무리 이성이 이성 같아보이지 않더라도, 형제는 형제로 대해줘야 하고, 자매는 자매로 대해줘야 합니다. 그게 서로의 관계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길이고, 서로 진짜로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는 길입니다잉~ 이건 제 경험담입니다잉~ 그냥 상대방이 ‘이성’인 걸 까먹고 있다가는 나중에 진짜 별 거 아닌 일 가지고 오해받고 상처받고 그러는 일들이 많아요잉~

암튼,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일차적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28절에도 나와있죠? ‘생육하고 번성해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라’ 등등의 표현은 모두 ‘다스리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적인 의미에서의 ‘다스림’이라는 것은, 강력한 전제 군주나 무력에 의한 잠정적인 평화의 의미가 아니라, 어진 왕의 선한 통치, 상호 공존과 인정, 친밀함에서부터 오는 평화를 가져오는 ‘다스림’입니다. 정복하라고 했으니까 뭐, 인간만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함부로 다루어도 좋고, 뭐 그런게 아니라는 거죠.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가 항상 이기는 ‘지배’로서의 다스림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서로 스스로 삼가고 희생하며 친밀함과 평화 가운데 서로 함께 공존하기를 지향하는 다스림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다스림에서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이미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레벨에 있는 거죠.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다스리라’는 명령이 이 정도의 수준인거죠.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이유는, 다른 어떤 존재들과는 달리, 우리는 ‘다스리는 자’로 지음받았기 때문이고, 그 ‘다스림’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닮은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친밀함과 상호 공존과 평화와 사랑으로 일체가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림을 본받아, 우리는 그 다스림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다스림의 방식과 방향성에 따라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면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언젠가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때인 ‘종말’이 오게 될 건데, 이 종말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겁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종말 = 창조의 회복’이라는 간단한 등식으로 표현할 수 있죠.

물론 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것이,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서 발가벗고 과일 따먹고 사는, 전자제품은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식의, 창조의 ‘겉모양’의 회복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창조시에 주어졌던 ‘관계’,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세상 사이의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대상으로서의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되는, “창조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세상을 다스려가면서 지향해야 할 목표점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만물이, 처음 창조되고 타락하기 이전에 그들이 하나님과 누렸었던 그 창조 관계(창조주-피조물간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세상을 다스려가는 것이죠. 이 일과 이 사명에 부름받은 존재가 있죠. ‘그리스도인’.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을만큼’ 선하게 창조하신 이 창조세계가 직면한 모든 종류의 질병과 왜곡과 우상화와 노예화에 온 힘을 다해 대항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에 대한 ‘다스림’의 책무입니다.

우리는 학생이니까 공부를 하죠. 공부를 하다보면 성적이 나옵니다. (확 짜증나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이 공부와 성적을 다스리고 계신가요, 아니면 성적이 여러분을 다스리고 계신가요? 다시 묻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공부를 하나님과 동행해 나가기 위한 좋은 도구로 활용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이미 성적의 노예가 되어 계신가요? ‘성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것을 우상화하도록 여러분들을 부추길겁니다. 성적이 말해주는 등수가 곧 여러분을 결정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수긍하게 하면서 ‘공부해서 남주냐?’는 논리로 여러분들을 성적의 노예로 만들어가는 거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부와 성적의 노예가 아닌, 다스리는 존재들입니다. ‘공부해서 남주자!’, ‘공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자!’ 선포하면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거죠. ‘지식’이라는 것이 창조되었을 원래의 창조 관계를 회복시키는 겁니다.

‘돈’에 대해서도 얘기해볼까요? 여러분은 아직 학생이라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청년들과 어른들이 ‘돈’을 쌓아두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세요. 그러나 ‘돈’이라는 것이 쌓아올려지다보면, 너무도 쉽게 ‘우상화’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선포하고, ‘주인’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돈의 원래 창조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데에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일찍이 칼빈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사회적 삶이란 부의 끊임없는 ‘순환’을 의미한다”고 했지요.

저는 요새, 딸아이가 이제 11개월이 되어가는데, 조금씩 커가는 모습들을 놓치기가 아까워, 거금을 들여 DSLR 카메라를 장만했고, 그 카메라로 봄이를 찍어주는 걸 참 재미있고 좋아라 하고 있습니다. 근데 만일 이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원래 창조의 관계의 회복으로 돌아가야겠죠. 창조주이신 하나님, 피조물인 카메라. 이 카메라를 통해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초점이 머무는 곳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또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칭찬해줄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저는 이 카메라를 잘 다스려야겠지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다스려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다스려서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 앞으로 데리고 나아올 여러분의 ‘세상’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실 만물을 다스리는 일은 원래 하나님의 일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이후로,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일은 하나님 대신 우리에게 맡겨지고 위임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도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고 계속해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점에서, 우리의 다스림은 결국 하나님의 온 세상을 다스리심에 함께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상”에 대한 다스림의 책무.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상에 대한 “다스림”의 책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명령 앞에,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다스려 세상과 하나님과의 원래의 창조 관계를 회복하는 이 일에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V/R,

Kim, Sung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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