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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성취의 도덕? (2)








(아랫 글 "성취의 도덕?(1)"에 이어서, 특별히 2번 comment에 덧붙여서,
'성취의 도덕'으로서의 신학이 아닌 '놀이(play 또는 joy로 영역되었다)'로서의 신학을 이야기하는 몰트만은..)





생태신학이 기존의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인간'관에서 '자연으로서의 인간'관으로의 근원적인 회심을 촉구하듯, 놀이의 신학은 단지 '일하는 인간'관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상상력에 동참하는 놀이의 인간'관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


우리는 일과 노동의 강박에 시달리며 자신이 무언가 일할 때에만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오해한다. 청교도들은 게으름이 종교적 죄악이라고 여겼으며, 자신의 경제적 생산물에서 하나님이 부여한 소명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때 우리 존재의 가치는 우리 존재 밖의 어떤 결과물에 의해 소외될 뿐이다.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의 이유를 달리 본다.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완료, 성공, 업적이 아니라, 창조주의 무한한 기쁨에 대한 유한한 모방으로서의 끝없는 아름다움과 자유이다. 창조의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케 하는 기쁨 외에 다른 어떤 필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종의 놀이이며, 하나님은 놀이의 하나님(Deus ludens)이시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도 하나님을 모방하는 놀이의 인간(homo ludens)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놀이는 단지 자본주의적 향락이나 소외된 노동을 지탱하는 비상구급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호흡과 우주의 존재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어주는 근본 상징이다. 우리 존재의 가치는 자신의 성취나 실패 여부에 앞서, 이미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아름답게 존재함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유를 넘어서 단지 존재함으로 가치있다. 놀이는 존재의 가치의 가장 깊은 상징이다.


"놀이로서의 세계라는 상징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 소유, 성취의 범주들을 넘어서서 존재함, 본질적인 인간 실존, 그것의 명시적인 축하와 같은 범주들로 나아가게 만든다. 놀이는 생산보다는 창조를 강조하고, 윤리적인 것(the ethical)보다는 미학적인 것(the aesthetic)을 강조한다. 땅에서의 노동은 축제, 춤, 가락, 그리고 놀이에서 쉼을 발견하게 된다."(몰트만, <<놀이의 신학(Theology of Play)>>)




- 손호현, <<아름다움과 악>>, 제 1권.




comment:


1. 역시 대가답다!는 평을하기에는 여기 소개된 부분이 그의 신학적 체계에 있어서 너무 주변부의 이야기이다. 그의 내공은 좀 더 깊은 이야기에서 드러나지만, 신학적 철학적 전이해의 제공 없이 이 곳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jargon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정치신학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하루 빨리 한국교회가 "새마을운동"적인 신학에서 한 단계 더욱 zoom out하여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즐거움'(몰트만이 사용하는 '놀이'라는 용어의 contextualized version이다)의 신학의 차원을 볼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3. 그러나. 뭐. '나'나 우선 잘 하자.






discussion topics:


1. Is Christian faith imperative or indicative?


2. 몰트만은 이렇게 '놀이'로서(한글 문맥과 어감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기쁘신 마음대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loving freedom을 이야기한다. 이걸 정확히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고.. 쨌든, love와 freedom은 과연 양립 가능한가? 수업을 마칠 때까진 당연히 양립가능하고 양립해야만 한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수업 후 교수님과 의견을 나누면서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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