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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설교] 마 22:24-40 "사람과의 관계: 사랑의 동역"


부천동광교회 DK Teens Worship 설교
2012년1월 29일
“사람과의 관계: 사랑의 동역”
김성은

마태복음 22장 24-40절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한복음 13장 34-35절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러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그쵸? 물론 중등부 수련회 같이 다녀온 친구들은 어제까지도 잘 봤지만 말이죠. 암튼,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보고싶었고, 함께 예배하고 싶었습니다. 중등부 수련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는 삶으로 그 은혜를 살아내야 할 일이 남아있지요. 기쁨으로 방방 뛰는 그 찬양의 열정을 우리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등부는 이제부터 시작이군요. 함께 할 시간들이 기대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관계.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 옆으로 사람과의 관계와 세상과의 관계, 안으로 나 자신과의 관계.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 우리는 ‘예배’라는 단어로 이 관계를 풀어나갔고,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정체성’이라는 단어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지요. 다 기억하시나요? 지난 주 예배가 가족예배였어서 좀 가물가물하시나요? 예배 다들 잘 드리셨죠?지난 주에 빠졌으니, 1월의 테마인 ‘관계’는 2월 첫 주까지 이어질 거고, 2월 둘째 주에는 그 관계 중의 가장 먼저 다루어졌던 ‘예배’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기대되시나요? (뭐, 기대된단 이야긴줄로 알겠습니다.ㅎㅎ)

기억을 더듬어봅시다. 예배란 건 바로 지금 이 때, 진짜로 하는 게 예배라고 했지요. ‘바로 지금 이 때’라는 건, 생각해보세요. 과거도 사실은 그 때에는 ‘현재’였잖아요. 미래라는 것도 언젠가는 현재가 되는 거죠.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 계속 영향을 받고 있긴 해요. 그러나 우리는 어쨋든‘현재’를 살아가는 거지, ‘과거’나 ‘미래’를 사는 게 아니죠? 작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오늘 2012년 1월 29일은 ‘미래’의 어느 날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을 ‘미래’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현재’로 살아가고 있죠? 그렇다면, ‘바로 지금 이 때’ 예배하라는 것은, 그냥 ‘지금 하고 말아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현재’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 곧 ‘항상’, ‘언제나’ 예배하라는 말씀이죠.

정체성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했던거, 기억하시죠? ‘소유가치’는 우리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가치가 “진짜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우리 가치를 높이거나 줄일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싸구려가 아니라는 얘기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거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사람은 끊임없이 죄를 짓지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예수님 이상으로 보셨는데, 우리 죄악되고 이기적인 인간은 죄 없으신 예수님 이상은 고사하고, 그분과 같은 레벨의 삶이라도 살고 계신가요? 멀리 가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같은 레벨의 삶이라도 살고 계시나요? 40일 금식기도 해보셨나요? 혹시 못에 박혀보신 적이 있으세요? 죽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전도사 하겠다고 나선저는 전혀 흉내낼 수 없던데요. 만약에 누군가가, “난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 사람 이름 뒤에 ‘교’를 붙여서, 김성은교, 뭐 이런 식으로 사이비 종파 하나 만들면 되는 겁니다잉. 우리 나라에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40여 분 된답디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의 포장되지 않고 화장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 모습 그대로, 완전 그냥 그대로, 쌩얼로, 옷으로 뱃살 가리고 뭐 그런거 없게 그냥 벌거숭이의 우리를 평가하신다면, 엄청 실망스러운 평가를 내리실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밖에 못사는 놈이 내 자녀고 내 백성이야?’ 뭐 이런 거죠.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평가하시고 그에 따라 우리에게 존재가치를 부여하셨더라면, 우리가 못되고 이기적이고 부끄러울 것이 있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의 자녀인거지, 니네 지금 그 상태로는 어림 없어’ 뭐 이런 거죠.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용납하시는 분이시죠. 혼자서 기도 5분 이상 못하고 그래도, 주기도문도 잘 못 외운다 해도, 하나님에게 사랑받을 만한 짓을 전혀 하지 않고 살고 있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우리는 그 분의 자녀라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아주 중요한, 복음의 핵심 때문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은 나를 보실 때에, 나의 어떠함을 ‘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나’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나의 어떠함’을 보시는 게 아니라,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보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시험볼 때 전국 1등과 답안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죠! (이거 상당히 괜찮죠잉?) ‘부족한 나의 얼룩진 어떠함’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으로 우리가 평가받는다는 거죠! 그러니 그 평가의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꼭 예수님만큼의 평가를 받겠죠! 성경에 나오는 말로 해보자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이자 딸로, 우리는 양자삼아졌다는 이야깁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칭의’라고 하고, 바로 여기에 우리의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자. 갑자기 뜬금없는 의구심이 들죠? 왜, 오늘 설교 제목은 사람과의 관계로서의 ‘사랑의 동역’인데, 왜 지난 번에 했던 이야기를 지금까지 질질 끌면서 이야기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복습이었으면, 도대체 오늘 진도는 언제 나가려는가? 과연 저 양반의 설교는 언제 끝나려고 저러는가? 뭐, 그러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전 지금까지 예배와 정체성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더랬습니다. 잘 모르셨을수도 있겠지만요. 자, 우리 우선 마태복음 말씀을 한 번 볼까요?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당시에는 구약성경밖에 없었으니, 이 질문은, “구약 성경을 가장 중요한 한 마디로 줄이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시네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것이다.”그렇죠? 뭐가 더 중요하겠어요?

근데 이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하십니다. 뭔가요?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거죠. 잘 들어보세요. “네 이웃을 네 자신 사랑하듯이 사랑해라.” 여기에는 두 가지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죠. 이웃 사랑과 자기 사랑이죠. 다시 한 번 잘 들어보세요. “니이웃 사랑하기를니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라”이 중에서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뭐가 더 먼저인 것 같나요? ……자기 사랑이죠! 자기를 사랑해본 적이 없으면 우리의 이웃도 사랑하기 어려운 겁니다. 옆의 친구 사랑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이제 좀 아시겠나요?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거라는 겁니다. 이게 분리된 게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를 스스로 용납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용납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암튼, 자기 사랑이 가능해야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첫째로는 하나님 사랑을 이야기하신 거고, 둘째로는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셨다는 겁니다.

근데, 말씀을 잘 보세요. 뭔가 정말로 중요한 걸 우리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거든요. 뭘까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자기사랑 사이에 있는 말인데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 중요한 건 이웃이 되었건 자기가 되었건, 암튼 사람 사랑은 하나님 사랑보다는 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근데 이 ‘그와 같다’는 표현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너희는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사람 사랑을 둘째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 ‘둘째’라는 것, 첫째와 같은 것이다”라는 게 예수님이 “그와 같다”라고 말씀하신 속내였습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사람 사랑과 ‘같은’것이며, 사람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는 것이죠. 이걸 조금만 더 묵상해보면, 하나님을 사랑함은 곧 사람을 사랑함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우리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곧 사람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우리는 사람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뭐,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과 기도하고 대화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등등.. 근데 거기에, 사람 사랑함이 빠져있으면, 미안하지만, 그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거짓말이라는 거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련회가 끝나고 뜨거운 찬양과 기도의 시간을 보낸 이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진 것을 느끼죠. 근데, 진짜 은혜 받았는지, 아니면 은혜 받은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꽤 단순합니다. 내 주위의 사람을사랑하게 되고, 이해하고 싶어지고, 맛있는 거 있으면 나눠먹으면 더 기쁠 것 같고 그러는지. 또한,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지. 사람을 멀리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나와 나 사이에서도 필요한 거고, 나와 나 사이의 ‘사랑’을 두고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단어로 이야기해보았었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그냥 ‘사랑’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우리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 ‘사랑’은 ‘동역’이 됩니다. ‘동역’의 뜻이 뭔지 아시죠? 함께 힘을 합쳐서 일한다는 거죠. 무슨 일을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잉. 우리 안의 서로 간의 사랑은, 우리 서로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돕는 동역자로 세운다는 거죠. 요한복음의 말씀은 아주 정확하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어떻게 된다구요?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의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하나님이 드러나신다는 거죠. 우리의 서로 사랑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된다는 거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일을 동역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점에서, 서로 사랑하는 ‘우리’는 동역자가 되는 거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정리해볼까요?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할텐데, 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사랑이 없이는 가능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에 기반한 이웃 사랑은 결국 “그와 같으니”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랑의 동역의 자리가 된다는 거죠.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점에서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지지난 주에 했었지요. 이 사랑의 쌍방향적 커플 관계를 우리도 경험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적 솔로님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고 했으니, 일단 우리는 짝사랑을 우선 받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만난다면,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된거죠. 대박인거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 사랑하는 것,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쉬운데, 정말로 어려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라셨으니,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V/R,

Kim, Sung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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