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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설교] 요 4:3-26 "하나님과의 관계: 예배"




부천동광교회 DK Teens Worship 설교
2012년 1월 8일
“하나님과의 관계: 예배”
김성은


요 4:3-26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김성은 전도삽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만나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되어 너무나 좋고 떨리고 설레이고 그렇습니다. 지난 주에도 했지만, 제 소개를 해보자면, 저는 역곡1동에서 태어났구요, 동곡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소사국민학교로 전학갔다가 다시 동곡국민학교로 와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역곡중학교, 부천고등학교를 나왔지요. 역곡1동 농협사거리쪽에서 살았다가 괴안동 삼익세라믹에 살았다가 역곡중 앞에 살았다가 중동으로 이사왔구요. 여러분의 나이대에 하나님을 만났고, 기타를 배우고는 밥먹고 자는 시간 빼고 하루좽일 찬양집을 뒤적거리면서 찬양했고, 그 분의 연애 편지인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고, 부천의 복음화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여러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 너무 떨리고 좋고 감격스럽고 그렇습니다. 빨리 여러분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나가고 싶네요~

모두들 잘 알겠지만, ‘세상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고, 여러분들은 이 말을 많이 들어왔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감있게 살게 한다는 점에서는 좋게 봐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혼자 살아보려해도 살아지지 않는 것이 ‘삶’입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사실 혼자 지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할 다른 사람의 ‘빈자리’를 의식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이지요. 따라서,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연결된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만의 개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에서부터 생겨나는 거죠.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나만의 개성도 없는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은 ‘관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이야깁니다.

그러한 관계들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여기(가운데) 있으면, 우리는 위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죠. 이 관계에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옆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죠. 여기에는 ‘사랑의 동역’이 필요하구요. 사람들과만 연결되어 있나요? 사람 이외에도 동물, 식물, 지구, 물건, 돈 등등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요. 여기에는 ‘다스림’이 필요하죠.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안쪽으로의 나와 나 자신간의 연결 관계. 여기에는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이번 1월달에는 이 네 가지의 연결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면서, 우리가 정말로 ‘관계’ 안에 함께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고, 이 관계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 하나 정말 깊고 넓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번 1월달에는 맛배기로 기본적인 방향성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떠세요? 기대되시나요? (님들 반응점여-_-)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초큼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죠. 혹시 이 이야기를 이미 아시는 분? (손) 처음 읽어보시는 분? (손) 네. 알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가 쭉 나오고 있지요. 한글 성경이 좀 딱딱하고 지루한 말투로 되어있어서 여러분들이 읽으시기에 좀 짜증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짜증을 좀 가라앉히시고 저랑 같이 한번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보자구요.

우선 7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동네에 가셔서 한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자가 9절에 뭐라고 대답하죠? 네, 뭐라고 길게 얘기합니다. 뭐 대략 “왜 나한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는 내용인 것 같아요. 까칠합니다잉. 물 한 바가지 그냥 줘도 될텐데, 왜/나/한/테/물/을/달/라/고/하/는/거/요? 라고 얘기하는 동안 저 같음 그냥 물을 줬을 거 같아요잉. 근데 뭐 그 때에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서로 아는 체도 안 할 만큼 사이가 굉장히 나빴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여자, 까칠합니다잉.

사마리아 여자의 까칠함에 예수님은 10절에서 “내가 누군지에 대해 니가 알고 있다면, 아마 니가 나한테 물을 달라고 했을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웃기죠. 상종도 안하는 어떤 듣보잡 아저씨가 나타나서는 물 먹고 싶어서 물을 좀 달라더니 말이죠. 그러니 여자는 곧바로 비웃는 투로 11절과 12절에서 얘기합니다. “아저씬 물 뜰 두레박도 없으면서, 무슨 수로 물을 구해서 나한테 물을 주겠다는 겁니까? 이건 우리 조상 야곱이 판 거라, 우리 껀데요. 물 뜰 두레박은 저한테만 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요. 12절 마지막 여자의 말에 붙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는 말은, 쫌 더 리얼한 우리 표현으로 바꾸면, “아저씨가 뭔데요?”정도가 되겠습니다. 그 앞에 붙은 ‘주여’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 말로는 일반적인 남자를 부르는 말인 ‘아저씨’ 정도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암튼,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13, 14절에서, “여기 이 우물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걸?” 여자는 완전 황당하죠. 그럼 그냥 예수님이 그 물 마시고 있으면 되지, 왜 이 여자한테 와서 물을 달라는 건지 알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여자가 푸념하듯이 15절에서 다음 대사를 던지는데요, 여기에 뭔가가 하나 숨어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15절에까지 등장하는 ‘주여’라는 표현은 이 여자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으로서의 ‘주여’라기 보다는, 그냥 ‘아저씨’ 정도의 표현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나한테도 그런 물을 주세요. 그러면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요.” 뭐가 숨어있는 것 같으세요? 여자의 이 대답에서 우리는 여자가 이렇게 물을 길러 오는 것을 힘들어 했구나 하는 것을 살짝이 짐작할 수 있죠. 물통 들고 댕기기도 당연히 힘들겠지만,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시다. 이 때까지 이 여자는 자신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분이 누군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대화는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16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당황한 여자는 “전 남편이 없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 여자의 복잡한 남자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죠. 그래, 너 남편 없는게 맞아.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까 니 말이 맞네.. 뭐, 요즘 드라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성경 안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것은 결혼과 이혼을 다섯 번씩 했다는 이야기이고,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이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결국 그 남자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유부남인데 이 여자랑 같이 살고 있다는 거죠. 즉, 이 여자는 소위 말하는 ‘불륜녀’였습니다.

그럼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런 일이 있었던 시간이 나오죠. 몇시죠? 여섯시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여섯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여섯시가 아니라, 정오, 낮 12시를 뜻합니다. 보통 그쪽 지방은 낮 12시의 태양 빛이 너무 뜨거워서, 사람들이 집 밖으로 잘 나가지를 않습니다. 건장한 30대 남자인 예수님도 너무 피곤해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대잖아요. 암튼 그래서 보통 일반적인 여자들은 아침 시간이나 오후에 태양빛이 약해졌을 때가 되어서야 우물가로 모여들었고, 거기서 한참 수다를 떤 이후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물가는 당시 주부들끼리 같이 만나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아줌마들끼리 친교를 나누던 장소였던 거죠. 여기에서 엄친아와 엄친딸의 전설이 창조되기도 하는, 뭐 그런 곳이죠. 옛날 우리 할머니적 시절의 ‘마을 빨래터’와 같은 그런 곳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우물가’입니다.

근데 이 여자는 태양이 가장 뜨거운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때에 말이죠. 그 이유는 예수님이 콕 찝어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5번 이혼녀이자 ‘불륜녀’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때에는 더더욱 사람들 사이에서 그 여자에 대한 뒷다마가 없을리가 없지요. 이 여자만 나타나면 아줌마들끼리 모여서 수근수근대는거죠. “저 여자 또 이혼했대매?”, “이혼은 언제적 얘기야, 벌써 또 다른 놈팽이랑 같이 산대~ 근데 이번엔 유부남인가봐~”, “헐 대박. 쪽팔리지도 않나?”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 차라리, 사람들이 우물가에 나오지 않는 땡볕 시간에 사람들 눈을 피해서 물을 뜨러 온 것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목마르지 않는 생수’ 얘기를 하실 때 이 여자가 15절에서처럼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에게 이 여자가 까칠하게 대했던 이유도 알 듯 하죠. 이미 옛날 남편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많이 받아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또 자신이 상처를 입을까봐’ 경계하느라 까칠하게 대했던 거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여자와 뜬금없는 대사를 날리면서 대화를 시도하신 까닭은, 이 여자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만지시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그제서야 이 여자는 예수님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절과 같이, “이제 보니 선지자셨군요!”라고 말하죠.

그러면서 이 여자는 평소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궁금증을 예수님께 꺼내놓습니다. 보통 인물이 아니니까,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거죠.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올바른 예배입니까? 하는 것이 이 여자의 물음이었습니다. 질문이 좀 뜬금없죠?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그 여자는 예배에 대한 상당히 많은 고민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당시에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것만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성전에서 드리는 것만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자기네만 옳다고 하고 싸우고 말도 안섞고 뭐 그렇게 살았더랬지요.

암튼 ‘예배’에 대한 여자의 물음은 예배의 ‘장소’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올바른 예배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에 대한 물음은 틀린 물음이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도, 저기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시간’에 대해 대답하셨다는 겁니다. 예배를 하게 될 ‘때’가 오게 될거다. 그런데 그 때, 예배할 때가 언제인지 23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그 때가 언제요? 네, 바로 ‘이 때’. ‘지금’이라는 말이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어떻게 예배하는 자들이요?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로. Spiritually and truly. 우리의 영혼을 다해서, 진짜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은 찾으신다는 이야깁니다.

‘영’과 ‘진리’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두려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이건 ‘진~짜로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예배를 진짜로 하는 기준이 뭔지는 좀 애매할 순 있지만, 그렇지 않나요? 나 스스로는 나 자신이 진짜로 예배했는지, 가짜로 예배했는지, 스스로는 알지 않나요? 괜히 가짜로 예배했으면서 이게 진짠가 싶을 때에 기준을 찾아서 아 그래도 이정도면 그럭저럭 했나보다 스스로 위안을 삼는거죠. 사실 자기가 스스로 진짜로 예배하면 기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잉~. 왜냐면, 예배라는 건 결국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죠. 다른 잣대를 들이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과 내가 만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거하게 되면, 그것이 예배냐 아니냐, 영으로 했냐 진리로 했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그 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예배에 단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겁니다.

근데, 이런 은혜로운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25절의 대사를 치면서 한 발 물러섭니다. 이런 내용이죠. “에이, 말씀하신 그 ‘때’는, ‘지금 이 때’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신 이후겠죠. 그 때가 되면 뭐 그렇게 예배하게 되겠죠. 지금은 아닙니다”라는 거죠. 곧바로, 예수님은 응답하십니다. “너와 대화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다, 내가 바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다” 메시야가 이미 왔으니, 예배할 그 ‘때’ 역시 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배할 때는 미래의 ‘그 어느 때’가 아닌,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진짜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쯤 돼서, 맨 앞으로 한 번 돌아가봅시다. 3절과 4절을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손짓) 유대는 여기 아래 있고, 갈릴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 중간에 있구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너무너무 싫어해서, 개만도 못하게 봤습니다. 그래서 유대 땅과 갈릴리 땅을 오가는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가까워도,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항상 돌아서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4절에 뭐라고 나와있나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로 ‘통행하신지라’가 아니라,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셨어야 했습니다’. 왜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죠. 가까우니까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절대로 그쪽으로 가로질러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죄’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습니다. 왜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지 않았을까요? 이 여자를 만나서 마음 깊숙한 곳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에게 바로 지금 ‘예배할’ 바로 그 때가 왔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6절에 보면, 예수님은 상당히 지치셨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로 가시는 그 길이 유대인인 예수님에게는 상당히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보는 눈도 그렇겠고, 유대인에게 까칠한 사마리아인들의 그 뻔한 태도를 모르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걸음의 순간에서 예배할 ‘때’, 바로 이 ‘때’를 찾으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오늘은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자 친밀한 관계이며, 어떠한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진~짜로 하는 것이 예배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때가 되었습니다. 설교 끝날 때도 되었고ㅋ, 예배할 때도 되었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우리, 예배합시다.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눈 감고 마음과 머리 속으로만 황홀경에 빠지는 것만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그냥 앉아있는 것만도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반드시 ‘우리 몸의 드려짐’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만 하셨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마땅한 ‘예배’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 분의 삶과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삶에서 예배해야 할 많은 자리들이 있습니다. 학생으로서의 공부하는 자리, 부모님과의 자녀로서의 자리, 분별과 가림 없이 친구들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친구로서의 자리. 예수님은 그 곳으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자리에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 자리에서 예배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한 주일의 삶의 예배에서도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V/R,

Kim, Sung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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