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동광교회 DK Teens Worship 설교
2012년3월11일
“소금그리스도인-빛그리스도인!”
김성은
마태복음 5장 13-16절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3월의 예배 테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실 2월달 청년부 테마도 ‘그리스도인’이었어서, 저는 좀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뭐, 너무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고, 또 약간 다른 각도로 이야기하는 것도 있어서, 그냥 용감하게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주제 소개를 지난 주에 했었어야 했는데, 지난 주에 설교를 좀 암울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뭐, 이 세상에서 우린 뭐, 그저 조금 더 받든지 조금 덜 받든지 암튼 세트로 묶여서 팔려가는 의미 없는 존재들이다.. 뭐 그런 얘기 했었죠. 설교 첫 분위기가 그래서 테마에 대해 설명하기가 좀 그랬어서, 이제서야 이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1월의 테마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그리고 2월에는 그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예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 기억하시죠?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이 하나님과 만날 때에 우리는 ‘개인’이 만나는 것이 아닌 ‘우리’로서 만난다는 거죠. 그리고 그 만남이 만일 이 곳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아무리 잘 예배해봤자 168중에 겨우 2만 예배한 거라는 얘기를 했죠. 166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에 우리가 ‘삶의 예배’,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잉.
3월의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정체성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에는 ‘참새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물음표가 중요한 거겠죠? 우리가 참새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잉. 근데 왜 그런 것처럼, 왜 참새인 마냥 어떻게 한 번 잘 팔려갈까 걱정하고 고민하고 안절부절하면서 두려워하고 있냐는 거죠. 세상은 여러분을 그렇게 취급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세고 앉아 계실 만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갖는 관심보다 더 많은 관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하심’은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의 가장 중요하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출발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선언이 먼저 나오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그 다음 절에 나오네요. 아, ‘빛과 소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소금과 빛’이네요. 우린 ‘빛과 소금’이라는 표현을 많이 들어왔는데, 성경에 나온 대로 보면 ‘소금과 빛’의 순서가 맞는 거네요. ‘뭐, 그게 그거 아냐?’, ‘그게 뭐가 중요해?’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순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서와 상관 없이, 그냥 발음의 편의상 ‘빛과 소금’(‘빛과 소금’이 ‘소금과 빛’보다 좀 더 발음하기가 편하죠?)이라고 불렀을 때에는, ‘아, 빛도 좋은 거고 소금도 좋은 거니까, 아, 너네는 세상에서 정말 귀중한 존재들이다 라는 얘기를 하려는 거구나, 지난 주 설교랑 비슷한 분위기겠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제가 여러분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쳐 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더러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때 당시에 소금은 정말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에야 소금이 흔하니까 별로 안 그런 거 같은데, 옛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기 전에는 소금이 금만큼 귀했답니다. 그래서 ‘작은 금’이라 해서, 소금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었지요. 믿거나 말거나.. (사실 ‘소금’은 순 우리말입니다잉) 암튼 예수님 당시에도 소금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답니다. 근데 그 귀중한 소금이 어떻게 자기 역할을 하냐면, 자기 스스로를 녹임으로써 주위를 짜게 하는 거죠. 다 알고 계시죠? 소금이 그냥 주위만 짜게 하면서 자기는 안 녹고 있는 경우는 없죠. 항상 소금이 자기 스스로를 녹이는 만큼 주위가 짜지는 겁니다잉. 자기가 스스로 녹아서 없어졌을 때에야 소금이 제 역할을 다하는 거죠.
예수님이 우리더러 ‘너네는 세상의 소금이야’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녹여 우리 스스로를 없애는 자리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주, 너무나도 쉽게, 먼저 빛이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린 너무나도 쉽게 ‘승리’를 생각하고 영광의 자리에 오를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뭐, 빛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때에는 소금처럼 섬기면서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것 같죠?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방향성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네가 먼저 소금이 될 때에 비로소 빛도 될 수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도 그런 것이, 예수님이 ‘승리’하신 방식은 철저히 ‘낮아지심’을 통해서였지요.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 하면, 그러면 뭐 다 죽음인거죠. 인간을 이기시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왜 못 이기셨겠습니까? 근데 우리가 잘 알듯이, 사실 예수님의 삶은 ‘실패’였던 것 알고 계신가요? 그렇게 열심히 사역하셨는데, 당시 사람들 중의 소수만 예수님을 따랐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 판인데, 예수님은 결국 그 분이 사랑하고 섬기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대신 죽겠다’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처절한 배신을 당했고, 그분의 삶은 그냥 ‘그러다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패배’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패배’였지, 결국 이것은 이러한 ‘패배’를 통해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승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승리’하신 방식은 철저히 ‘죽음’을 통해서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빛’이 되신 방식은 철저히 ‘소금’의 삶을 통해서였습니다. 사실상 ‘승리’, ‘강함’, ‘발전’, ‘효율’ 등의 가치는 이 세상의 가치이지, 하나님의 가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치는 ‘사랑’, ‘관계’, ‘고난’, ‘오래참음’, ‘연단’, ‘섬김’입니다. 거꾸로 뒤집힌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는 ‘이기는 것’이 정말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 정말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금’으로서의 삶에, 우리 자신을 녹이면서까지 희생하는 삶에,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13절에 나오죠. 좀 끔찍한 얘기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읽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무슨 얘긴가요? ‘너네가 소금과 같이 녹아지지 않으면, 빛이 되기는 커녕, 세상에서 그냥 ‘쓸데 없이’ 여겨지고 ‘밖에 버려지고’‘밟혀지는’ 그 상황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묶여서 팔리듯이, 너네는 세상에서 계속 그런 취급을 받게 될거다, 니네가 그나마 있는 ‘소금 결정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녹아 없어지지 않게 계속 발버둥치면 칠수록, 너네는 세상의 그러한 푸대접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소금과 같이 녹아 없어지는 삶을 살아라. 그렇게 살 때에 너희는 ‘빛’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속이야기입니다.
15절에 보면 등불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의 조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장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 불을 끄면 꽤 어둡거든요. 그러니까 환하라고 켜는 게 등불입니다. 등불을 킨다고 하면, 그 등불이 이 방을 가장 환하게 비춰줄 수 있는 곳에 두거든요. 어두우니까, 빛이 이 방의 구석구석에 가서 닿으라구요. 어느 누구도 마룻바닥 아래에 등불을 숨겨놓지 않거든요. 혹시 어둡다고 형광등을 켜놓고 그 형광등을 서랍 속에 넣어놓는 분들 계십니까? 책상 아래에 집어넣는 분들 계십니까? 그래서 형광등은 누구나 다 잘 보일 수 있는 곳에 놓는 겁니다.
15절 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키면요, 마루 아래에 두지 않는대요. 우리나라도 옛날 한옥은 땅바닥이랑 마루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는 거 다 아시죠? 사극에서도 다 나오죠? 해품달 보시나요? 암튼, 등불은 마루 아래에 두는 게 아니고, 등경, 그러니까 등불 받침대 위에다 올려놓는대요. 그래야 방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니까 서로 잘 보이는 거죠.
다소 뜬금없는 등불 이야기가 나왔는데, 앞의 ‘소금과 빛’ 이야기와 정확하게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머리 속으로 잘 알아오고 있죠. 그런데 이게 머리 바깥으로는 안 나온단 얘기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머리 속에서만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거죠. 이건 등불을 켜서 마루 바닥 아래에 놓고, 형광등을 켜서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16절의 말씀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착한 행실’은 그저 헤헤 웃고, 듣고도 모른 척 하는 게 아닙니다. ‘균형’을 맞추는 것,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그리고 그 착한 행실을 머리 속에만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비칠 수 있도록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소금과 빛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이 있고, 바로 여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소금’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우리는 ‘빛’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걸 한 마디로 줄여서, 우리는 ‘소금과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빼먹은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소금 속의 소금, 빛 속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다. 또한 마루 아래에 넣어두거나 서랍 속에 넣어놓으라고 우리를 빛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행동하고, ‘세상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더러움과는 분리되어 홀로 고매한 의인이 되는 길은, 매우 깨끗해 보일 수 있으나,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과는 전혀 반대의 길입니다. 귀찮고, 불편하고, 힘들고, 복잡하지만, 세상의 문제에 참여하는 것. 너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나를 녹이면서까지 세상을 섬기는 것. 바로 그 때에 우리는 빛이 되어, 우리의 선한 행실을 세상에 비춰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의 방향성이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의 이유와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V/R,
Kim, Sung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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