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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구원의 '중재'로서의 선교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했을 때 그들이 과연 구원을 선택할지는 결코 자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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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의 웁살라 총회(1968)는... 구원을 4가지 차원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1) 착취와 반대하는 경제적인 정의, (2) 억압과 반대되는 인간의 존엄성, (3) 소외와 반대되는 연대, (4) 인간 삶에 있는 실망과 반대되는 소망을 위한 투쟁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 4가지 차원을 서로 연결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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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상호 의지하고 모든 개인들이 상호 관계의 그물 속에 존재하는 세상에서 구원을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제한하는 것은 전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증오, 부정, 억압, 전쟁과 다른 형태의 폭력들은 악의 표현들이다. 인간성에 대한 관심, 기근, 병, 무의미의 정복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소원하고 힘쓰는 구원의 일부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마6:10). 이것으로부터 이 땅은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성화의 현장인 것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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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원과 복지는, 비록 그것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결정적인 요소이며, 하나님의 통치는 결정적인 범주이며, 기독교 복음은 현대의 해방 운동들의 의제와 동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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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능력들을 결코 과대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자력 구원과 관련된 모든 현재의 이론들과 관련해서 중대한 질문들을 해야 한다. 최종적인 구원은 인간의 손으로,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원 비전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어떤 특정한 계획을 하나님의 통치를 충만함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껏해야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가교를 건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초월적인 성질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을 고수한다. 구원은 회개와 개인적인 믿음의 헌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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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선교는 구원을 제공하는 하나님과 그 구원을 갈망하는 세상간의 계속되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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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통치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구원 직설법(구원은 이미 현실이다!)과 구원 가정법(포괄적인 구원은 아직 더 성취되어야 한다!)의 긴장으로부터 구원 명령법(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라!)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모든 눈물을 제거하실 것을 아는 자들은 지금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눈물을 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젠가 더 이상 병이 없을 것을 아는 자는 적극적으로 지금 사회와 개인 속에서 병의 정복을 기대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적이 사라질 것을 믿는 자는 이미 가정과 사회 속에서 역사하는 그 대적을 지금 대적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구원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 David Bosch, <<변화하고 있는 선교>>
참고) 구원을 '중재'한다는 표현은 '내'가 구원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선교는 결국 '세상'을 '나'에게로 연결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중재'라는 개념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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