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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김성은] 성서 텍스트와 대화하기 (서론)


작년 6월 중순경, <현대선교신학> 수업의 기말 레포트로 썼던 "성서 텍스트와 대화하기"의 서론만 옮겨온다. 기말레포트 마저도 긴박히 쓸 수밖에 없었던 그 때가 기억난다. 이번에도 또 그렇게 되겠지. 지나고 보니 재미는 있다. 좀 더 치열하게 기술해야 했을 부분도 눈에 띈다. 마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올 6월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어 버린다.

연세대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선교학'이다. 연세대 '선교학'의 '선교'는, '술'로서의 선교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의 '경계를 넘는 것'으로서의 선교이다. 그런 점에서 선교학 수업의 기말레포트의 제목이 "성서 텍스트와 대화하기"일 수 있었고, 그 주요 자료로 들뢰즈, 레비나스, 바흐친을 가져올 수 있었으며, 성적 또한 우수(-_-)할 수 있었다. 일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그랬다. 신학책만 읽지 말고 일반 서적좀 읽으라고. 그러면서 추천해 준 책이 한비야씨의 책이었다. 당시 나는 칸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얘길 꺼냈더라..?

암튼, 서론의 마지막 즈음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거칠게 뒤적거리는 내용을 선이해 없이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너무들 오해들 하고 그러지 말자.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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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문제제기 및 당위성



대한민국 정치가 뜨겁다 못해 팔팔 끓는다. 그 시작은 지난 4월 11일에 열린 대한민국 19대 총선이었다. 현 대통령 체제의 정부에 대한 여러 방면의 부정적인 평가가 고조에 달한 만큼, 보수 집권 여당마저 당명 교체 카드를 꺼내들면서까지 현 정권과의 단절을 시도해야 했던 때였다. 이전에 비한다면야 야권의 연대도 이 정도면 훌륭했다. 몇몇 사소해보이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분위기라면 정권 교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총선은 그 이후에 있을 대선에서의 더 큰 승리를 위한 교두보였다. 집권 여당의 쇄신 움직임은 그나마의 권력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스처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야권 연대는 그야말로 ‘멘붕’을 맞이하였다.

야권이 주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던 총선 이전의 상황은, 돌아보니 결국 여권의 교묘한 작전과 야권의 무능력의 조화로운 만남 덕택이었다. 여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책 선거’를 부르짖었다. 야권은 사실상 ‘MB OUT’의 구호를 야심차게 꺼내들었지만, 이는 여권에서도 동일하게 꺼내든 구호였다. 극명한 입장차가 보여야 할 곳에, 그래서 현 정권 심판론을 등에 업어야 할 곳에, 여야간의 입장차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야권의 ‘정책’이 그렇게 ‘잘’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주무기를 빼앗겼다면 얼른 다른 카드를 꺼내들어야 했었지만, 야권은 그걸로 만족했고, 유권자들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다. 정권 내내 달고 다녔던 ‘소통의 부재’는 야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도 못했고, 감동을 주지도 못했다. 더욱이 민주통합당의 그 ‘노란색’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감성팔이를 하던 야권은, 정책을 꼼꼼히 준비한 여권에게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다. 야권은 정말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여권은 지금까지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믿어주니 고맙다면서 쇄신을 약속했다. 야권은 자신들의 진정성을 제대로 소통시키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는 서로 자신들의 진정성을 어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들 있다. 최신의 소식으로는, 월급과 관련한 새누리당의 자율적 세비 반납[1]과, 그에 따른 민주통합당의 평생연금 폐지안[2]이 맞붙었다. 다들 자기들의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가 뜨겁다 못해 팔팔 끓는다. ‘대의제’라는 명목으로 일선에서 밀려나 있는 국민들의 속내도 팔팔 끓는다.

현 정권에 대한 옹호와 반대의 경계를 넘어서 공유되어왔던 문제점은 내내 ‘소통’이었다. 그렇다면 현 정권은, 또한 국민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 야권 연대는, 줄창 ‘소통의 단절’을 외쳐왔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대단스럽게도 ‘소통’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연신 강조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소통이 어렵던지, 그냥 마주앉아 이야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이게 쉽지 않아 보인다. 도대체 ‘소통’이란 무엇이길래, 다들 갈구하지만 실제로 이토록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것인가? 대의 민주주의에서 기분 좋게 설정한 국민의 대표로서의 ‘국회의원’은 현실에서는 ‘국민’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가 참 어려운 일인듯 싶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비단 정치에 국한된 것이기만 한가? 교회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빈번하다. 교회라고 해봤자 좀 더 거룩하고 나은 면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교회만큼 사람 등치기에 좋은 곳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전하다. 하나님에게 내 진정성을 알아달라고 열심히 요구하고, 성서를 읽을 때에는 이언령 비언령 식으로 읽어댄다. 하나님과의 소통과 대화가 교회만큼 얼룩지거나 왜곡된 곳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고 더욱 열심히,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힘쓴다. 힘쓰고 힘써서 하나님이 ‘오케이’ 사인을 내준 것 같아 실행에 옮겼건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그리 물리쳐져 있어야 할 문제들이 생기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개독교’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분명히 하나님이 ‘오케이’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 다다르게 되면, 도와주시기로 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아니면 나의 열심이 부족한, ‘내 잘못’이다. 이쯤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는 성경 구절은 밀레니엄이 도래하기 전에 이 땅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외쳐댔던 무리들의 아스름한 구호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를 노예화시킨다. 분명히 하나님과의 대화를 갈구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십사, 우리를 도와주십사 하지만,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소통 단절적 결과는 빈번히 목도되는 바이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굉장히 형이상학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한국교회라는 컨텍스트를 마주하여 신학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더없이 실존적인 질문이다. 만일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그저 자기폐소성에 빠져 ‘하나님’이라는 절대 권위를 힘입어 ‘내’가 말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신앙의 가능성이란 전혀 무의미한 것이거나 또는 자아분열적 노예화를 부추기는 암(癌)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어버린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 인식과 관련하여, 본고는 이번 학기 <현대선교신학> 과목에서 살펴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사상에 기대어 ‘성경 텍스트’와 독자 간의 대화의 가능성을 논하고자 한다. 굳이 ‘성서 텍스트’를 겨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실 바흐친의 대화이론에 따르면 대화 안에서 나-주체와 타자는 서로 변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의 논의가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의 문제로 전개가 된다면, 일반적인 한국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에는 ‘인격’의 개념이 녹아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변한다’는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리 큰 어려움은 아니며,[4] 따라서 ‘대화’의 화두를 가진 이 논의의 파급력은 미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변해야 하는 것’의 영역에 ‘성서 텍스트’가 들어간다면? ‘성서 텍스트’와 ‘독자’ 간의 대화에서 ‘성서 텍스트도 변해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변화시키기까지 하는 그 대화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들뢰즈, 레비나스, 바흐친 등이 제기한 ‘타자’에 ‘신’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그들이 중점적으로 개진하려 했던 ‘타자의 윤리학’의 가장 주요한 겨냥점은 사람 간의 관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역시도 한국교회의 컨텍스트를 고려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고 성서 텍스트와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사람과 사람 간의 문제는 외려 아주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을 너무 쉽게 노예화시켜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그 ‘하나님을 위한다’는 생각이 정말 그러한지는 두고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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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비웅, “새누리 의원들 ‘국회 열지 못해 반성합니다’ 6월 세비 전액 자율 반납하기로,” 『서울신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620005008>, [2012.6.20].
[2] 류정화, “민주당 초선 20명 국회의원 평생연금 폐지’“, 『중앙일보』,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6/21/8153043.html?cloc=olink|article|default>, [2012.6.20].
[3] 요한복음 8:32.
[4] 물론 기독교의 신론을 어떻게 정위할 것인가에 따라 ‘하나님이 변한다’는 명제는 충분히 좋은 논쟁의 포인트가 되고도 남겠으나, 여기에서는 우리가 처한 한국교회의 컨텍스트 안에서 어떤 것이 더 유의미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신관은 서구 전통적인 초월론적 유신론이 한국교회의 신학 안에 충분히 자리잡히기 이전에 이미 한국 고유의 신인관계 혹은 구약성서 안의 헤브라이즘적인 신인관계가 혼합적으로 들어와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신관은 사실상 ‘변할 수 있는 신’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이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근거로 ‘합리화’시킬 수 있는 여지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로고스적 ‘성서’의 문제와 연결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변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가장 알맞은 겨냥점은 바로 ‘성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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