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26 14:26 블로그 작성)
오늘 아침 연세대에서도 월터스토프의 강연이 있었기에, 그 후기를 남겨보려고 한다. 질의응답 시간이 짧은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1. 연합뉴스가 헤드라인과 주요 문장으로 꼽은 "예배의 주체는 당회", "목회자는 당회 권위 아래 있다" 등은, 월터스토프가 개혁교회전통 예배의 주요한 특징 7가지 중의 한 꼭지에만 해당되는 것. 무엇이 안 그렇겠냐마는, 연합뉴스의 기사는 오늘의 강연을 도구화하여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부분적인 fact를 사용하여. 즉, 본 기사는 강연자의 전체 강연 방안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기 보다는, 강연자의 강연 내용 일부를 사용하여 기자의 기대를 강연자의 세계적 명성 위에 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본 강연은 개혁교회 전통의 예배의 '예전'에 대한 논의였고, 강연자는 '예전'을 보다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즉, 현대의 예배 안에서 성도들의 예배드림은 매우 수동화되었으므로, 성도들이 그저 '듣는 관객'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예배를 enact할 수 있기 위해 '예전'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혁교회 전통의 특징을 7가지로 살펴보고, 이 중에서 현대 교회가 취해야 할 것과 취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을 나누어 설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주요한 특징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지만, 성찬을 굳이 매주 행하지 않았던 전통개혁교회의 특징을 굳이 따르기 보다는, 성찬 등의 성례나 혹은 죄고백 및 사죄의 선언, 임재의 기도 등을 현대교회의 예배에서 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3.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강연자는 연합뉴스가 편집한 것처럼 한국교회에 일침을 가하는 행위는 자제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 강연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 '한국교회에 대해 하실 말씀'을 묻는 질문들이 많이 있었는데, 강연자는 사실상 한국교회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었고, 통역하셨던 차재승 박사님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선을 그으셨다. 그러나 질문자들은, 뭔가 서양 백인 남성의 저명한 학자가, '너네 그러면 안돼'라며, 한국교회에 일침을 놔주기를 바랬던 것 같았다. 잘 모르겠다는데도, 자꾸 '한국교회에 대해 한 말씀 좀..' 한다.
4. 내가 이해한 바로는, 연합뉴스의 관찰과는 다르게, 강연자는 목회자를 '까기' 보다는 오히려 '두둔'하고 있다. 물론 목회자가 당회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은 설교자의 설교에 대한 의혹의 해석학의 가능성이 비쳐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 전통에서 예배가 '회중이 하는 말(기도,찬양) + 회중에게 하는 말(설교)'로 보려는 견지에서 설교는 그저 인간만이 예전의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전의 행위자가 되어("God is not merely present; God is active. God is liturgical agent"), 설교는 단순히 인간이 하는 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고 본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저서인 Divine Discourse에서 상세하게 논증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is)"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철저한,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신뢰의 해석학이다. 강연자가 목회자를 '두둔'하고 있다는 내 관찰의 주된 근거이다.
5. 문제는, 그게 그처럼 단순한가이다. 설교와 설교자는, 예배 안에서 임재할 뿐 아니라 '행동'하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매번 '하나님의 말씀'이(is) 되는가? 원론적으로는 당연히 동의하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설교자들의 수많은 설교의 내용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가능성을 매 주일마다 목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를 아주 단순화하여서, 같은 성서본문에 대한 해석은 매번, 설교자의 묵상, 지식, 관찰, 필요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달라진다. 해석학적 다원성의 결과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설교자가 성서본문을 의식/무의식적으로 '도구화'하는 데에서 오는 결과일 수도 있다. 개업예배 본문으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대적하면서 던졌던 언설을 택한다든지, 세월호 참사로 인한 들끓는 애도와 분노의 시기에 '국민미개론'을 펼친 이들의 설교이든지, 설교는 얼마든지 설교자에 의해 '오염'될 수 있으며, 또한 '오염'되어 있다. (잘 새겨야 할 것은, '오염' 그 자체를 완전히 박멸시킬 수 있는 것은 아마 고전13:12에 언급된 '그 때'에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누구의 설교는 '오염'되어 있고, 누구의 설교는 '오염'되어 있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인간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데에는 항상 그 '한계'를 지닌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설교에 대한 신뢰의 해석학과 더불어 '의혹의 해석학'은 필수적이다.
6. 강연자는 세계적 석학으로, 강연이 주로 추구하고자 하였던 '예전'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탁월한 논증으로 그의 결론까지 회중을 인도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강연을 의도적으로 한국교회를 질타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강연자 스스로가 선을 그었고, 또 내용적으로도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본 강연에서는 컨텐츠로서 설교자의 설교에 대한 '의혹의 해석학'에 대하여 침묵에 가깝다시피 하였다. "예배의 주체가 당회"라는 언급은 설교자 한 사람만이 예배의 주체가 아니고 평신도 전체가 예배의 주체여야 하며, 그러한 점에서 설교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평신도 중에서 세워진 '당회'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상 그다지 효과적인 '의혹의 해석학'에의 두둔은 있어보이지 않는다.
7. 나는 연합뉴스의 기사를 들고 와서, 이 기사가 매우 작위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너는 설교자를 '두둔'해야 한다고 보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니, 난 외려 본 기사의 기획에 동감한다. 설교자는 어떻게든 '견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자신과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목소리를 더욱 걸쭉하게 하는 방법, 신뢰감 들게 말하는 방법, 감동을 이끌어내서 회중의 눈물을 쥐어짜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만 반성하고 성찰하지 말고, 적어도 자신의 머리 안에 들어온 생각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일 것인지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제도적으로라도 이러한 '의혹의 해석학'적 장치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적어도 국민미개론 따위는 펼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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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40525048200005&input=sns
세계적 기독철학자 월터스토프 "예배의 주체는 당회"
2014-05-25 15:38
세계적 기독철학자 월터스토프 "예배의 주체는 당회"
"목회자는 당회 권위 아래 있다"…새문안교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예배를 주도하는 주체는 신자들의 공식적인 기관인 당회이며,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당회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철학자 니컬러스 월터스토프(82) 예일대 신학대학 명예교수가 24∼25일 서울 신문로1가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7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강연에서 강조한 개혁교회 예배의 특징이다. 미국의 네덜란드 이민자 가정 출신인 월터스토프 교수는 칼빈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칼빈대와 예일대에서 종교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한국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같은 베스트셀러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월터스토프 교수는 강연에서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예배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조직화된 지역교회의 회중이라는 공식적인 모임"이라며 "공식 모임이라는 말은 교회가 구성원들이 선출한 장로들로 구성된 권위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장로들의 모임인 당회는 예배를 책임지며, 장로들은 회중의 권고에 따라 안수목회자를 청빙하고 그에게 예배 인도, 설교, 성례 집행, 축도를 맡긴다는 것이다.그는 "평신도의 참여가 예전(禮典)의 실행에 본질적이라는 점에서, 평신도가 당회의 장로들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교회의 예배는 회중에게 속한다"면서 목회자는 어디까지 당회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그러나 미국 기독교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매우 다른 일이 종종 발생한다"며 "설교자가 전적으로 혼자서 움직이면서 회중에게 예배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모습은 개혁교회의 예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그런 경우 설교자의 신학은 개혁교회적일 수는 있지만 예전을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소집되고 조직화된, 지역교회 회중의 공식 모임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월터스토프 교수는 "그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회중의 지체로서 개혁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연극에 참석하는 것과 같다. 연극의 관객은 결코 예배를 위한 공식적인 모임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오늘날 미국의 상당수 개신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회중이 중세 말 로마가톨릭교회의 회중과 유사하다는 점은 교회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그는 "회중은 참여자들이 아닌 관객들로 이뤄져 있으며, 사람들은 일종의 종교적인 혜택을 받고자 교회에 출석해 찬양팀에서 감동을 받고 설교에서 영감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혜택을 얻지 못하면 다른 교회로 옮기고 만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k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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