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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보상주의



(2015/03/17 15:47 블로그 작성)


보상주의.


엊그제 오랜 선생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복음을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문제를 한국교회의 문제로 꼽으셨다. 예수 믿으면 금생에서 물질의 복을 받게 되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게 된다는, 소위 삼박자 구원론의 문제가 여전히 한국교회를 붙잡고 있다는 말씀이다.

매우 동의하면서, 필자는 한국교회의 비복음화 내지는 복음의 변질의 문제를 '보상주의'에서 찾고 싶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물질주의와 다르지 않다. 예수를 잘 믿으면 사업이 번창하여 풍족한 삶을 누릴 것이라는 물질주의는, 예수 잘 믿는 보상으로 경제재화를 득하는 보상주의와 결을 같이 한다. 그러나 '보상주의'라는 말이 포괄하는 범위는 물질주의의 그것보다 넓어질 수 있는데, 이는 '신앙의 슬럼프'의 문제에 이를 때에 선명해진다.

소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옛적의 열정과 눈물을 잃어버린 채, 그것이 습관이든 죄책의 부담감이든 하릴 없이 교회에 나아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 보면 찾아오는 것이 '신앙의 슬럼프'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전통적인 견지에서 '말씀'과 '기도'가 대두되어 왔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에 힘쓰면, 이러한 신앙의 슬럼프는 어느 샌가 극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 성심과 정성을 읽으면서 동시에 '보상주의'적 욕망을 읽는다. ('욕망'이라는 표현은 그것의 의도가 '악'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정과 사모하는 감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스스로 속물이기를 주저하는 이들은 굳이 물질로서 보상받으려는 생각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더라도, 적어도 처음 마음의 '뜨거움'은 보상으로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한계성이다. 바쁜 일상과 게으름 사이를 오가는 여유의 에너지를 대가로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에 투자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이 있을 거란 생각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지금 우리네의 '강퍅해짐'은 우리의 투자의 가벼움 때문이니, 대가를 지불하라. 그러면 보상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보상'이라는 것이 어떤 때에는 분에 넘치게 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는 때가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보상'이 터무니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매번 보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한 보상이 충분할 거라 생각되는 기라성같은 전병욱 같은 이들 - 전씨가 말씀묵상과 기도에 소홀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은 오히려 그 순간에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었다. '보상'이 충분치 않다 못해 '없다'고 느껴진다면, 혹은 그 '보상'이 '상'은 커녕 개독으로 변질되는 '악'이라고 생각된다면, 보상주의에 편승한 신앙인들은 다른 것 아닌 신앙 그 자체를 내려놓기까지 한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이따금의 경우에 한정하여 충분치 않은 보상에 대해 하나님에게 따져 물을 의향이 필자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물질주의'를 넘어선 '보상주의'까지 넘어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본회퍼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을 옥중에서 남겼다. 맨 처음의 '하나님'은 작업가설의 신, 기계장치로서의 신(deus ex machina), 즉 도깨비방망이로서의 하나님, 자판기 하나님, 쉬운 결말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 그저 들어주시기만 하는 하나님, 우리를 축복해주시기만 하는 하나님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이미 왜곡된 하나님이자, 자기화된 하나님이다. 나의 내면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기제이지(이러한 점에서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 비판은 예언자적이었다), 초월적이고 외재적인 하나님은 아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자기화된 하나님 상 '없이', 보상과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따르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살아가다 삶의 고됨과 어려움의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기계장치로서의 신은 없다 했으니, 이 난관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위해 하나님 자판기에 동전을 넣기 보다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그 난관을 뛰어넘고 극복하기를 노력해야 한다. 그 뛰어넘고 극복하려는 노력의 순간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간이 된다. 이것이 본회퍼가 본, 종교를 뛰어넘어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필자의 언어로 '보상주의'가 극복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퍼붓는다 해도 보상이 있기란 쉽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어느 샌가 차갑게 식어 열정을 잃어버릴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말씀과 기도로 담금질 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 '살아감'을 지속하는 것도 한 방법이란 생각이다. 담금질 한다고 해서 모두 다 '뜨거워짐'의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물론 때로는 효과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남아있는 신앙 마저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는 '보상주의'적 관계의 대척점에 서 있는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에 만족할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너는 나를 찾으라"는 성경의 언어를 우리는 좀 더 '비통하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언설을 원리로 읽다보면 하나님은 원리와 체계 안에 박제화될 뿐이다. 그 살아감의 전체를 통하여 우리가 우리의 관심에만 매몰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불완전하게밖에 살아갈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런 여전한 불완전한 존재에게 이미 해방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바로 오늘의 지난함을 살아가는 나와 너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이 조금 더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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