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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복음'과 관련한 유체이탈 화법에 '주의'하며 (줄여서, '복음주의')




(아래 글은 나의 페북에 2014년 9월 26일에 작성하였음.)





얼마 전에 미국의 누군가가 '청년들이 교회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5가지'에 대해 글을 썼는데, 나름 내막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던 어떤 분이 그에 대한 대답조로 청년사역 활성화 방안에 대한 글을 썼다. 처음 그 글을 읽을 때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이 그 분인 걸 몰랐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거 OOO같은 사람이구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맨 마지막에 그 분의 이름이 뙇. 돗자리를 펴야 하나..

조악한 권위적 어투로 쓰여진 그 분의 주요한 대안들에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매우 자주 건드려진다. 본질로 돌아가라는 식으로. 복음을 경험해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런데 점점 읽다보면 이 사람이 사용하는 '복음'이라는 것의 의미가 다소 모호함을 직감하게 된다. 여기까지 오면, 이 사람은 '복음'이 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이게 바로 '유체이탈 화법'이다. 자기가 사용하는 개념어가 도대체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고, 어떤 전제 위에서 사용되는지를 모른 채, 그냥, 좋은 것 같으니 막 갖다 쓴다. 특히 목사들에게 있어서, '복음'이라든지 '예수' 등의 단어는 아무래도 상당히 '본질'에 가까울 거란 생각에 '무조건' 가져다 쓴다. 그 개념적 단어가 부각되어야 할 '문맥적 조건' 혹은 '상황'과는 상관 없이, 그저 그냥 '무조건' 가져다 써버린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의 준말이다. 그러므로, 다분히, '대명사'이다. 로또를 샀는데 로또 추첨 방송을 보니 내가 쓴 여섯 개의 숫자가 다 맞았다고 하면, 로또 1등 당첨을 알리는 방송 내용이 '복음'이다. 이미 두 번이나 거절된 내 미국 비자를 미대사관에서 재검토해본 결과 유학비자를 내주기로 결정(되었으면 좋으련만!..)되었다면 유학비자 발급 소식은 내게 '복음'이 된다. 무슨 말이냐면, '복음'이라는 것은 그 소식이 복된 이유, 즉 '내용'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손쉽게 말할 수 있겠지. 하나님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옳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 그리고 내가 경험해 본 '그 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 이것을 뭔가 주술 외듯이 '무조건'적으로 갖다 붙이기도 한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은 다름 아닌 2000년 전의 이 스토리를 그대로 동어반복하는 정도에만 머물러 버리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예수 십자가 사건 그 자체는 아무리 반복해도 불충분하다 할 만큼 매우 중요한 내러티브이며,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사건이다. 문제는, 그것이 가진 진정한 '의미'의 드러남 없이, 그저 주문 외우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주술적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바리새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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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두고 바울은 '죄와 죽음과 율법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말했다. 옳다.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해방'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해방 사건'이다. 우리를 옭아메는 모든 것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신 사건이 바로 예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숫자놀음'에 대해 옭아메여진 채 복음이라는 것을 청년사역의 도구화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아. 물론 공동체에게 있어서 '숫자'라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배타되어야 할 가늠자는 아니라 믿는다. 그 역시 많은 것을 말해주는 주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본 그 분에게 '숫자놀음'은 절대적 지표였다. 예수가 어쩌고 저쩌고 성령이 어쩌고 저쩌고 복음이 어쩌고 저쩌고 했지만, '숫자놀음'의 족쇄로부터는 결코 해방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열심은 있는 사람이고 종교적 황홀경의 경지를 맛본 사람이긴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복음을 진정으로 경험해본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저 단순히, 예수의 2000년 전의 행적이 동어반복적으로 진술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되지는 않는다. 설교자에 의해서든 청중 스스로에 의해서든(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령에 의해서), 그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이 '지금, 여기,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어떻게 하나님과의 화목함으로 이끄실지에 대한 의미의 발견이 있은 이후에야 복음이 복음이 될 것이다.



*혹시 '그 분'이 누군지 알겠다 하더라도 굳이 실명을 거론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단순히 뒷담화로 남기고 싶은 이유도 없지 않겠으나, 여전히 '그 분'의 영향력 안에서 잘 지내고 있는 이들도 있기에. 다만 제가 '날라리'인 관계로 그저 사회에 불만 많은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수도 있다는..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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